제 2회 전국 오월창작가요제 총감독을 맡아서 일을 수행했다
본선에 올라 온 10개 팀의 라이브 앨범까지 처리하느라
뒷마무리가 아직은 덜 되고 있다
행사를 끝내놓고 나니 여러가지 생각이 난다
80년 광주의 오월의 함성을 승리로 바꾸고자
모두가 광주로 모여들던 시절
기타 하나에 허접한 휴대용 앰프하나 들고
거리로 나섰던 노래일꾼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광주의 오월을 사랑하는 전국의 노래일꾼들이
이 곳 광주로 모여들 던 시절
그 시절 거리에서 한없이 외치며 목놓아 부르던
오월 거리음악제가 지금은
창작가요제란 이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하는 일과 노는 성격은 서로 인연없는 보이지만 깊은 관계가 있다
광주의 오월을 노래했던 주체들이 다시 창작가요제를 빼들고
앞장에 서 나가는 것이 그렇고
가요제는 지금의 단순한 위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언젠가는 오월을 모티브로
모두가 하나되는 진정한 광주 아닌 전국
아니 세계적인 음악의 한마당으로 승화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오기까지 배경
전국 오월창작가요제
전국 오월창작가요제는
대한민국의 광주라는 도시에서 진행되어 왔던 오월 거리음악제를 계승한 행사로 출발하였습니다.
무작정 뛰어 들었습니다.
80년 민중항쟁이 독재의 총칼아래 짓밟혀 버린 암울했던 시절.
광주에 있던 노래인들은 무작정 기타하나 메고 금남로로 나가 광주의 오월을 노래했습니다.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노래해야 했던 참담함이 우리의 산 역사였습니다.
하나 둘 나중엔 여럿이 모여 오월 거리음악제를 시작하였습니다.
기타 하나에 허접한 휴대용 앰프하나 들고 거리로 나섰던
광주의 노래일꾼들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5.18을 사랑하는 전국의 노래일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부르는 이와 관객이 하나되어 목놓아 부르던 금남로의 노래가 큰 줄기가 되어
광주의 오월 거리음악제가 되었습니다.
수백 여 팀의 전국 노래팀들이 참여했던 오월 거리음악제는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4년을 지속하였습니다.
14년의 긴 세월만큼 오월 거리음악제는 광주시민들에게 깊은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시민들의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해마다 오월이 되면 꼭 오월 거리음악제를 보러가야겠다는 시민들도 사그러 들었습니다.
좁디 좁은 거리라는 공간에서 쭈그려 앉아 보게 하는 것도 그렇고 시대가 변한 만큼 새로운 공연양식과 내용이 필요하게 됨을 절감하였습니다.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오월 거리음악제 추진주체들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변화된 시대적 상황과 시민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제로 도약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오월 거리음악제는 2004년에 안정된 공간과 큰 규모의 행사로 발돋음 하기 위해 [THE PEOPLE]이라는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세계 속의 민주의 성지 광주를 말하고 노래하는 음악제로 가기 위한 발판들을 만들어 나가는 시작일 뿐인데 주위의 조건들은 벼랑이었습니다.
온갖 부딛침 끝에 예산을 확보하여 첫 해 행사를 성황리에 치루어 냈습니다.
한 해 행사를 작은 규모지만 성황리 치루긴 하였으되 다음 해 예산지원이 정부로부터 끊기게 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재정의 문제였습니다.
멀리 내다 볼 때 세계적인 저항음악제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실현해 낼 수 있는 선택이었으나 작은 예산이거나 불안한 예산지원의 상태에서는 실현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결국은 한 해의 행사만을 치루고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전국 오월창작가요제입니다.
긴 장고를 거듭한 끝에 잡아낸 행사가 전국 오월창작가요제입니다.
5.18민중항쟁 30주년이 되던 2010년에 맞추어 음악제에 대한 불길을 다시 지폈던 것입니다.
많은 논의를 마치고 전국 오월창작가요제가 막을 올렸습니다.
광주의 오월을 말하는 노래 한 곡 만들어내거나 부르지 않고 있는 이 때에
광주의 오월을 창작하고 진실을 노래하고 가슴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창작가요제는 대중들의 정서에도 부합되며 5.18의 전국화에도 큰 불을 지펴내게 되었습니다.
100회를 보고 달려 가겠습니다.
광주의 정체성을 살려내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30 여년의 음악여행을 하고 있는
광주의 노래일꾼들의 마음은 광주만의 순결성입니다.
순결덩어리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전국 오월창작가요제는
여러분들의 전폭적인 지지만이 앞으로 100회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광주만의 진정한 음악축제를 위해 멀리 보고 달려갈 것입니다.
전국 오월창작가요제는 지금의 단순한 위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규모가 커질수록 내용은 풍부해 질 것이며 다채로운 음악행사로 발전을 꽤해 나갈 것입니다.
5.18 민중항쟁의 정체성을 모티브로 모두가 하나되는 진정한 광주 아닌 전국,
아니 세계적인 음악의 한마당으로 승화 될 때까지 달려가겠습니다.
본선에 올라 온 10개 팀의 라이브 앨범까지 처리하느라
뒷마무리가 아직은 덜 되고 있다
행사를 끝내놓고 나니 여러가지 생각이 난다
80년 광주의 오월의 함성을 승리로 바꾸고자
모두가 광주로 모여들던 시절
기타 하나에 허접한 휴대용 앰프하나 들고
거리로 나섰던 노래일꾼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광주의 오월을 사랑하는 전국의 노래일꾼들이
이 곳 광주로 모여들 던 시절
그 시절 거리에서 한없이 외치며 목놓아 부르던
오월 거리음악제가 지금은
창작가요제란 이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하는 일과 노는 성격은 서로 인연없는 보이지만 깊은 관계가 있다
광주의 오월을 노래했던 주체들이 다시 창작가요제를 빼들고
앞장에 서 나가는 것이 그렇고
가요제는 지금의 단순한 위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언젠가는 오월을 모티브로
모두가 하나되는 진정한 광주 아닌 전국
아니 세계적인 음악의 한마당으로 승화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오기까지 배경
전국 오월창작가요제
전국 오월창작가요제는
대한민국의 광주라는 도시에서 진행되어 왔던 오월 거리음악제를 계승한 행사로 출발하였습니다.
무작정 뛰어 들었습니다.
80년 민중항쟁이 독재의 총칼아래 짓밟혀 버린 암울했던 시절.
광주에 있던 노래인들은 무작정 기타하나 메고 금남로로 나가 광주의 오월을 노래했습니다.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노래해야 했던 참담함이 우리의 산 역사였습니다.
하나 둘 나중엔 여럿이 모여 오월 거리음악제를 시작하였습니다.
기타 하나에 허접한 휴대용 앰프하나 들고 거리로 나섰던
광주의 노래일꾼들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5.18을 사랑하는 전국의 노래일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부르는 이와 관객이 하나되어 목놓아 부르던 금남로의 노래가 큰 줄기가 되어
광주의 오월 거리음악제가 되었습니다.
수백 여 팀의 전국 노래팀들이 참여했던 오월 거리음악제는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4년을 지속하였습니다.
14년의 긴 세월만큼 오월 거리음악제는 광주시민들에게 깊은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시민들의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해마다 오월이 되면 꼭 오월 거리음악제를 보러가야겠다는 시민들도 사그러 들었습니다.
좁디 좁은 거리라는 공간에서 쭈그려 앉아 보게 하는 것도 그렇고 시대가 변한 만큼 새로운 공연양식과 내용이 필요하게 됨을 절감하였습니다.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오월 거리음악제 추진주체들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변화된 시대적 상황과 시민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제로 도약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오월 거리음악제는 2004년에 안정된 공간과 큰 규모의 행사로 발돋음 하기 위해 [THE PEOPLE]이라는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세계 속의 민주의 성지 광주를 말하고 노래하는 음악제로 가기 위한 발판들을 만들어 나가는 시작일 뿐인데 주위의 조건들은 벼랑이었습니다.
온갖 부딛침 끝에 예산을 확보하여 첫 해 행사를 성황리에 치루어 냈습니다.
한 해 행사를 작은 규모지만 성황리 치루긴 하였으되 다음 해 예산지원이 정부로부터 끊기게 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재정의 문제였습니다.
멀리 내다 볼 때 세계적인 저항음악제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실현해 낼 수 있는 선택이었으나 작은 예산이거나 불안한 예산지원의 상태에서는 실현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결국은 한 해의 행사만을 치루고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전국 오월창작가요제입니다.
긴 장고를 거듭한 끝에 잡아낸 행사가 전국 오월창작가요제입니다.
5.18민중항쟁 30주년이 되던 2010년에 맞추어 음악제에 대한 불길을 다시 지폈던 것입니다.
많은 논의를 마치고 전국 오월창작가요제가 막을 올렸습니다.
광주의 오월을 말하는 노래 한 곡 만들어내거나 부르지 않고 있는 이 때에
광주의 오월을 창작하고 진실을 노래하고 가슴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창작가요제는 대중들의 정서에도 부합되며 5.18의 전국화에도 큰 불을 지펴내게 되었습니다.
100회를 보고 달려 가겠습니다.
광주의 정체성을 살려내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30 여년의 음악여행을 하고 있는
광주의 노래일꾼들의 마음은 광주만의 순결성입니다.
순결덩어리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전국 오월창작가요제는
여러분들의 전폭적인 지지만이 앞으로 100회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광주만의 진정한 음악축제를 위해 멀리 보고 달려갈 것입니다.
전국 오월창작가요제는 지금의 단순한 위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규모가 커질수록 내용은 풍부해 질 것이며 다채로운 음악행사로 발전을 꽤해 나갈 것입니다.
5.18 민중항쟁의 정체성을 모티브로 모두가 하나되는 진정한 광주 아닌 전국,
아니 세계적인 음악의 한마당으로 승화 될 때까지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