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은 일에 살아있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
<인터뷰> 창작 20주년 기념공연 가진 박종화 시인
2007년 10월 03일 (수) 09:03:41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9월 중순 창작활동 20주년을 기념해 공연을 가진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90년대 초반 시위현장에서 가장 널리 불리운 투쟁가요 ‘바쳐야 한다’, ‘투쟁의 한길로’ 등을 만든 박종화(44) 시인.
지난 9월 15일과 16일 창작 20년 기념 콘서트 ‘값있게 살자’를 광주와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그의 ‘골수팬’들만이 참석했지만 “그냥 공연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가는 눈빛이어서 보람되고 홀가분하다”고 했다.
치열한 시대를 노래하고 시로 옮겼던 ‘문예 전사’인 그가 창작 20년을 기념해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지만 하필 한국진보연대 출범일과 겹쳐 많은 이들이 함께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고.
문예강연보다 통일강연을 더 많이 다녔다는 그, 무대에서 온몸으로 절규하듯 시를 낭송하는 열정을 지닌 그, 술을 좋아하기로도 유명하지만 술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그...
20주년 콘서트를 마친 그는 “지금도 창작하며 시를 쓰고 노래 불러도 항상 짐을 지고 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공연을 치르고 나니까 상당히 홀가분하다”고 말했지만 “시와 노래가 길거리에 있지 창작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지금 고민 중에 있다”고 새로운 모색을 시사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달 27일 오후 1시 30분부터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느끼고 가는 눈빛이어서 보람되고 홀가분하다”
▲ 9월 27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얼마전 박 시인의 창작 20주년 기념공연 ‘값있게 살자’가 열렸는데, 좋은 성과를 거뒀는지?
■ 준비는 많이 했는데 진보연대 출범식과 겹쳐서 80,90년대 올해까지 근 30년대에 걸친 노래들을 풀어놨는데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공유 못했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완전히 골수팬들만 왔다. 얼굴 모른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선전이 제대로 안 된 것도 있다. 투쟁하고 민중음악이라고 만드는데 큰 진보연대 출범식이 있어서 홍보하기도 어렵고 조심조심 준비를 하게 됐다.
서너 달 전에 준비돼 연기가 불가능해 정말 상황이 어려웠다. 단 한 사람이라도 공연을 보러왔는데 취소되면 안 될 것 같아 너무 걸려서 단 사람이라도 공연 오면 하겠다고 했는데 큰 대극장에서 몇 백명 앉혀놓고 하려니까 좀 뭐 했다.
음악 생활 20년을 결산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적은 숫자지만 깊이 공감, 공유하고, 많은 것을 느끼고 간 것 같다. 대중의 눈빛이. 공연 끝나고 한사람 한사람 악수하고 자축도 하고, 그냥 공연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가는 눈빛이어서 보람되고 홀가분하다.
지금도 창작하며 시를 쓰고 노래 불러도 항상 짐을 지고 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공연을 치르고 나니까 상당히 홀가분하다.
▲ 9월 15,16일 광주와 서울에서 창작 20주년 기념공연을 가졌다. [사진출처 - 박종화 홈페이지(www.jonghwa.net)]
□ 박종화 하면 시인이라고 떠올려지는데 시를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 노래를 먼저 시작했다. 작곡을 먼저 시작했고, 87년 첫 곡을 대중에게 알렸다. 시집을 낼 때가 91년인가 조금 뒤에 첫 시집을 내고 세 번째 시집까지 냈다.
초기에는 공연 행사를 많이 갔었는데 나이를 조금 먹고 나니까 시발표하는 행사가 많았다. 거의 공연에는 스스로 잘 안 나갔다.
시대가 변해가면서 시의 개화기, 만발기라 할 정도로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민중의 편에 서서 행사장을 채웠는데 90년대 중반부터 추모시, 축시가 많이 필요한데 어느 순간부터 시인과 시들이 대중을 안 만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당일 써서 당일 내보내야 할 상황도 많아 나라도 해야 겠다고 나서게 돼 시낭송 무대에 훨씬 많이 서게 됐다. 10년 넘어가면서는 제 정기 공연 외에는 거의 노래하지 않고 꼭 가야할 곳 아니면 노래를 삼가는 편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시인들 뿐만 아니라 민중가요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많던 노래패들이 하나씩 둘씩 문 닫기 시작한 분위기, 전체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노래패는 채울 수가 있는데 시가 빠지면 (행사가)많이 허전하다. 요즘에는 많이 늘어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아, 이렇게 30년대가 지나갔구나”
▲ 민중가요와 더불어 30년대를 지나왔다는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창작활동 20년을 맞은 소감이나 총평은?
■ 30년의 역사가 제 노래를 통해 제 스스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바쳐야 한다’를 부르고 있으면 집회현장에 선듯 미치광이처럼 최류탄 냄새가 난다.
공연장에서 마지막에 와주신 골수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눈물을 많이 주더라. 희망과 기쁨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아, 이렇게 30년대(80, 90, 2000년대)가 지나갔구나. 역사의 흐름이 역사에 묻어나고 이것이 민중가요인가 보다 새삼 배우게 되고...
절박하게 뭔가를 해야 한다기 보다는 끝나니까 오히려 차분해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젊었을 때 했던 고민들이 차분한 상태에서 들어가더라.
앞으로 창작을 하더라도 새로운 기분으로 과거의 당연히 해야된다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혁명적 기질이라고 하고 전선 기질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거운 짐처럼 있었는데 정리하는 기분이었다. 좀더 차분한 기분으로 앞으로 다시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새로운 출발같은 기분들을 많이 느꼈다.
솔직히 한마디로 너무너무 시원했다. 빨리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악조건이었지만 털어버려 그것이 소득이었다.
□ 새로운 고민의 내용은 무엇인지?
■ 아직은 좀 지켜봐야겠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창작을 어떤 입장과 견해, 정견을 가지고 대할 것인가,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어차피 민중 시와 노래이지만 어떤 녹아나는 위치가 될 것인가 지켜봐야 할 것이다. 시와 노래가 길거리에 있지 창작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지금 고민 중에 있다.
□ 그간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이나 시기가 있었다면?
■ 지금도 정신적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정국은 분신정국이다. ‘바쳐야 한다’, ‘투쟁의 한길로’를 발표했던 시점에 그때가 분신정국이었다. 강경대 열사니 줄줄이 분신하고, 그때가 가장 정신적 공황기라고 할까.
그때 저는 2집 ‘고난의 행군’ 내고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항일투쟁사를 정리한 테입인데 징역살고 있고 밖에서는 분신정국이 이어지고, ‘바쳐야 한다’, ‘투쟁의 한길로’는 당대를 휩쓴 노래로 밖에서 불려지고...
음악하면서 가장 크게 남아있는 일이다. 너무 안타까웠고 분신정국에서는 밖에서 계속 ‘투쟁의 한길로’가 불려지고 있고 징역 안에서 신문으로 접하고 있고. 전대 후배인 박승희 열사도 분신해서 가고, 그 과정이 정말로 힘들었던 시절이다.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음악으로 나아갔으면”
▲ 민중가요가 발전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는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20년을 민중민족 문예운동으로 일관했는데 되돌아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민중이 있는 한 민중가요는 필요하고 민중을 위한 시와 노래는 필요하다. 어떤 형태든 현 시기 민중에 맞는, 민중이 이해 못하더라도 때로는 교양할 필요도 있고 문화전사로서 밀고 갈 필요가 있고 그것이 감동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변화된 시기 민중음악이 다른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객관적이고 민중정서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민중가요라고 정리돼서 지금도 그 장르가 있고 지금도 스스로 민중가요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가요가 계속 질적 발전 과정 제대로 밟지는 못했다. 활동 창작단위가 새로운 국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예전 표현으로 좀더 전투적 모습으로 변화된 정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인자들을 발굴하고 실력자들이 후대에서 계속 나와줘야 한다.
기존 지키던 사람들만 계속 지키고 있으면 인생의 싸이클처럼 하락곡선을 계속 걷다가 민중이 바닥칠 때, 민중의 요구가 많아질 때까지 자연발생적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는가. 헤쳐 나가고 민중에게 녹아나는 음악을 해줬으면, 변화된 시기 좋아하는 음악을 과감히 채택하고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음악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 그간 개인적인 어려움도 많았을텐데
■ 항상 똑같이 어려우니까 어려움을 밥처럼 먹고 사니까, 고난과 시련이 개인에게 주어진 길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고 쭉 와서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있다가 없어지면 힘들기도 할텐데 25년동안 줄기차게 똑같은 생활이다 보니까 그것도 관성이 되는 것 같다. 딱히 어렵다기 보다는 생활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더라.
□ 그간 많을 분들을 만났을텐데. 꼭 떠올리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 예술적인 면에서는 김남주 선배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실질적으로 초창기 작품은 남주형 작품인지 저의 작품인지 독자가 모를 정도로 20대 습작기 때는 한창 연습하고. 현실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책장이 떨어질 정도로 시집을 읽었고.
문학상에 부끄럽게 내봤는데 심사위원장인 김남주 선배가 뽑아줘 시를 쓸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예술 면에서는 그분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이다.
운동선상에서는 가까이 수없이 많은 동지를 뵜지만 가까이 어버이처럼 같이 살았던 분들이 남는다. 좀더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가셔서... 어버이 뻘이지만 동치처럼 친형처럼 많이 의지하게 되고 어버이처럼 의지하기도 한 류락진 선생이 마음에 남는다.
“김남주 선배와 류락진 선생 마음에 남는다”
▲ 그는 예술활동의 스승은 김남주 시인이라고 밝혔다. [사진출처 - 박종화 홈페이지]
□ 문화 쪽에서 쭉 활동해 왔는데 이른바 ‘딴따라’ 기질 같은 것은 없었나?
■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외려 태어나면서, 살아오면서 족적이 그래서인지 전사적 기질이 있지 예술적 기질은 없는 것 같다. 많이 노력하고 제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적 정서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데 남들보다 덜 게을리 했던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 좋은 의미의 기질을 말했는데, 다소 부정적인 ‘리버랄’한 조직과 융합하지 못하는 그런 기질을 물었다.
■ 아무래도 있다. 조금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고 동전의 뒷면도 봐야 되는 게 예술가적 기질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이 보아서는 담배꽁초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될 수 없다.
조직생활은 사무국장이나 집행위원장을 맡겨놓고 시 쓰고 노래하라면 어려움이 많다. 현실적으로 자유롭게 내비쳐지는 측면들이 있지 않겠는가.
□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안다. 술, 담배를 좋아하나?
■ 술 많이 먹으면 하도 많이 먹고 실수도 많이 하고 한번 먹으면 10박, 20박 아무 일도 안하고 대작하는 사람만 바뀌고 나는 똑 같고...
그때 그런 시절 돌이켜 보면 미치지 않고 오늘 하루와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는 치열하게 살아온 시절에 술이라는 친구가 몸을 혹사시키는 대상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술 때문에 버티기도 하고 밤에 날새서 작업하는데 담배피면서 생각하고 사색하고 이랬던 나름대로 좋은 점은 있었다. 노래 속에서도 ‘술 마시고 싶을 때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라는 구절도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젊음과 열정을 다 태워보고 사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미다. 술이라는 것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지금은 술 때문에 몸이 엄청 망가졌지만, 최소한의 신진대사로 100년 사느니 혹사시켜 가면서 50년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술이 주는 약리적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고민과 방황, 쓸데없는 풀리지 않는 고민, 술이 친구처럼 고민을 희석시켜주기도 하고. 지금 그때처럼 먹으라면 먹을 수 없겠지만.
□ 이번 기념공연에 ‘골수팬’들이 왔다고 했다고 했는데, 어떤 이들인가?
■ 광주나 서울이나 좀 있다. 제가 하는 일, 제가 만드는 작품에 의의나 토를 달지 않고, 어렵고 힘들 때 같이 있어준 동지들이다. 팬이라면 너무 가볍고 그런 분들 때문에 버텨왔다.
연봉 200만원도 안 되는 가난한 민중가요 작곡가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걷어서 도와주고 그런 분들만 온 것이다. 거기에 왔던 동지들이나 공연하는 저나 마음이 똑 같은 거다. 내가 안타까우면 그들도 안타까워하고...
수는 적었지만 알찬 공연, 그것만으로 만족하자고 생각했다.
“문예강연보다 통일강연을 더 많이 나갔다”
▲ 그의 말투에는 전라도 억양이 배어있고 그의 눈빛에는 시인의 우수가 어려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가족들은 어떻게 되나?
■ 쌍둥이 아들 둘이 는데, 자기들 음반도 낸 적이 있다. 광복 60주년 기념 통일노래다. 인터뷰를 엄청 많이 했는데 스트레스를 받았다. 심지어 조선일보가 학교까지 찾아가 3일동안 학교를 안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준비해 5학년 3월달에 발표했는데, 애들이라 노래부르는 것 싫어하고 글쓰는 것도 많이 가르치고 가사도 써보게 하고 직접 쓴 가사로 아빠가 곡을 붙여서 내준 적이 있다. 자기들이 크면 그 앨범 한 장이 가치가 있겠지만 지금은 모르는 것 같다.
지금 공연 하자하면 안 한다. 20주년 기념공연 게스트로 한번 해달라 해도 안 한다. 노래하는 것을 안 좋아하는데 노래는 잘한다.
□ 지금 시집이나 음반을 준비중인 것이 있나?
■ 없다. 조금 쉬면서 구상해보려 한다.
□ 통일 문제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
■ 학생운동 하면서부터 광주라는 기질도 그렇고 전남대라는 기질도 그렇고, 학생 때부터 통일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분위기였다. 통일 세미나나 학습을 많이 하고 자연스럽게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래 창작 발표하면서도 문예강연보다 통일강연을 더 많이 나갔다.
꾸준히 통일 관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범민련 사업을 초창기 때부터, 20대부터 쭉 관여하다보니까 통일사업과 밀접하게 연관돼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직책을 맡고 있나?
■ 중앙위원이고, 지역에서는 광주전남본부 부의장이다.
□ 북에 가서 공연한 적은 없나?
“맡은 일에 살아있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
▲ 새로운 모색을 하며 미래를 구상하고 있다는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공연한 적 없다. 공연하고 싶었는데 할 기회가 없었다.
첫 번째 2001년 8.15행사에 갔을 때 7박 8일간 갔다가 강정구 교수와 함께 구속된 6명 중에 한 명이었다. 어처구니없이 걸려들어 가지고... 그 이후 금강산만 갔다 왔다.
지금은 자격정지, 집행유예기간이다. (2000년 8.15행사)그 건이다. 이번 5월에 상고 취하를 했다. 문재룡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5명이 대법 상고중이다. 5년이 지나도 재판을 안 붙여줘 저는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상고를 취하했다. 취하하면 바로 확정되는데, 몇 년인지도 잊어버렸는데 자격정지와 집행유예 기간이다. 재판을 늦게 붙이면 그게 문제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줄기차게 통일의 한길로 달려오신 분들 많은데, 그리고 그 치열했던 순간에도 남과 북이 모여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미친놈, 빨갱이라고 했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결국 수많은 사람이 평양을 가고 있다. 우리 싸움이 가장 합당하고 정당한 통일투쟁이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빨리 가서가 아니라 기득권 보수세력이 이권과 권력, 부를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우리를 핍박, 억압했기 때문에 그랬지만 결국 민중의 힘을 당해내기 못하고 오고가고 있다.
국가보안법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지금은 서서히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이 돈만 있으면 평양 가듯이 많은 공감을 얻어 없어질 수 밖에 없다. 사상, 생각, 정견의 자유가 넘치는 세상은 얼마가지 않아 올 수 밖에 없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힘내서 자기가 맡은 일을 살아있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줄기차게 자기 삶을 유지시켜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인터뷰> 창작 20주년 기념공연 가진 박종화 시인
2007년 10월 03일 (수) 09:03:41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9월 중순 창작활동 20주년을 기념해 공연을 가진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90년대 초반 시위현장에서 가장 널리 불리운 투쟁가요 ‘바쳐야 한다’, ‘투쟁의 한길로’ 등을 만든 박종화(44) 시인.
지난 9월 15일과 16일 창작 20년 기념 콘서트 ‘값있게 살자’를 광주와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그의 ‘골수팬’들만이 참석했지만 “그냥 공연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가는 눈빛이어서 보람되고 홀가분하다”고 했다.
치열한 시대를 노래하고 시로 옮겼던 ‘문예 전사’인 그가 창작 20년을 기념해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지만 하필 한국진보연대 출범일과 겹쳐 많은 이들이 함께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고.
문예강연보다 통일강연을 더 많이 다녔다는 그, 무대에서 온몸으로 절규하듯 시를 낭송하는 열정을 지닌 그, 술을 좋아하기로도 유명하지만 술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그...
20주년 콘서트를 마친 그는 “지금도 창작하며 시를 쓰고 노래 불러도 항상 짐을 지고 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공연을 치르고 나니까 상당히 홀가분하다”고 말했지만 “시와 노래가 길거리에 있지 창작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지금 고민 중에 있다”고 새로운 모색을 시사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달 27일 오후 1시 30분부터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느끼고 가는 눈빛이어서 보람되고 홀가분하다”
▲ 9월 27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얼마전 박 시인의 창작 20주년 기념공연 ‘값있게 살자’가 열렸는데, 좋은 성과를 거뒀는지?
■ 준비는 많이 했는데 진보연대 출범식과 겹쳐서 80,90년대 올해까지 근 30년대에 걸친 노래들을 풀어놨는데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공유 못했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완전히 골수팬들만 왔다. 얼굴 모른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선전이 제대로 안 된 것도 있다. 투쟁하고 민중음악이라고 만드는데 큰 진보연대 출범식이 있어서 홍보하기도 어렵고 조심조심 준비를 하게 됐다.
서너 달 전에 준비돼 연기가 불가능해 정말 상황이 어려웠다. 단 한 사람이라도 공연을 보러왔는데 취소되면 안 될 것 같아 너무 걸려서 단 사람이라도 공연 오면 하겠다고 했는데 큰 대극장에서 몇 백명 앉혀놓고 하려니까 좀 뭐 했다.
음악 생활 20년을 결산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적은 숫자지만 깊이 공감, 공유하고, 많은 것을 느끼고 간 것 같다. 대중의 눈빛이. 공연 끝나고 한사람 한사람 악수하고 자축도 하고, 그냥 공연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가는 눈빛이어서 보람되고 홀가분하다.
지금도 창작하며 시를 쓰고 노래 불러도 항상 짐을 지고 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공연을 치르고 나니까 상당히 홀가분하다.
▲ 9월 15,16일 광주와 서울에서 창작 20주년 기념공연을 가졌다. [사진출처 - 박종화 홈페이지(www.jonghwa.net)]
□ 박종화 하면 시인이라고 떠올려지는데 시를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 노래를 먼저 시작했다. 작곡을 먼저 시작했고, 87년 첫 곡을 대중에게 알렸다. 시집을 낼 때가 91년인가 조금 뒤에 첫 시집을 내고 세 번째 시집까지 냈다.
초기에는 공연 행사를 많이 갔었는데 나이를 조금 먹고 나니까 시발표하는 행사가 많았다. 거의 공연에는 스스로 잘 안 나갔다.
시대가 변해가면서 시의 개화기, 만발기라 할 정도로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민중의 편에 서서 행사장을 채웠는데 90년대 중반부터 추모시, 축시가 많이 필요한데 어느 순간부터 시인과 시들이 대중을 안 만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당일 써서 당일 내보내야 할 상황도 많아 나라도 해야 겠다고 나서게 돼 시낭송 무대에 훨씬 많이 서게 됐다. 10년 넘어가면서는 제 정기 공연 외에는 거의 노래하지 않고 꼭 가야할 곳 아니면 노래를 삼가는 편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시인들 뿐만 아니라 민중가요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많던 노래패들이 하나씩 둘씩 문 닫기 시작한 분위기, 전체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노래패는 채울 수가 있는데 시가 빠지면 (행사가)많이 허전하다. 요즘에는 많이 늘어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아, 이렇게 30년대가 지나갔구나”
▲ 민중가요와 더불어 30년대를 지나왔다는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창작활동 20년을 맞은 소감이나 총평은?
■ 30년의 역사가 제 노래를 통해 제 스스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바쳐야 한다’를 부르고 있으면 집회현장에 선듯 미치광이처럼 최류탄 냄새가 난다.
공연장에서 마지막에 와주신 골수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눈물을 많이 주더라. 희망과 기쁨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아, 이렇게 30년대(80, 90, 2000년대)가 지나갔구나. 역사의 흐름이 역사에 묻어나고 이것이 민중가요인가 보다 새삼 배우게 되고...
절박하게 뭔가를 해야 한다기 보다는 끝나니까 오히려 차분해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젊었을 때 했던 고민들이 차분한 상태에서 들어가더라.
앞으로 창작을 하더라도 새로운 기분으로 과거의 당연히 해야된다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혁명적 기질이라고 하고 전선 기질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거운 짐처럼 있었는데 정리하는 기분이었다. 좀더 차분한 기분으로 앞으로 다시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새로운 출발같은 기분들을 많이 느꼈다.
솔직히 한마디로 너무너무 시원했다. 빨리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악조건이었지만 털어버려 그것이 소득이었다.
□ 새로운 고민의 내용은 무엇인지?
■ 아직은 좀 지켜봐야겠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창작을 어떤 입장과 견해, 정견을 가지고 대할 것인가,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어차피 민중 시와 노래이지만 어떤 녹아나는 위치가 될 것인가 지켜봐야 할 것이다. 시와 노래가 길거리에 있지 창작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지금 고민 중에 있다.
□ 그간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이나 시기가 있었다면?
■ 지금도 정신적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정국은 분신정국이다. ‘바쳐야 한다’, ‘투쟁의 한길로’를 발표했던 시점에 그때가 분신정국이었다. 강경대 열사니 줄줄이 분신하고, 그때가 가장 정신적 공황기라고 할까.
그때 저는 2집 ‘고난의 행군’ 내고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항일투쟁사를 정리한 테입인데 징역살고 있고 밖에서는 분신정국이 이어지고, ‘바쳐야 한다’, ‘투쟁의 한길로’는 당대를 휩쓴 노래로 밖에서 불려지고...
음악하면서 가장 크게 남아있는 일이다. 너무 안타까웠고 분신정국에서는 밖에서 계속 ‘투쟁의 한길로’가 불려지고 있고 징역 안에서 신문으로 접하고 있고. 전대 후배인 박승희 열사도 분신해서 가고, 그 과정이 정말로 힘들었던 시절이다.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음악으로 나아갔으면”
▲ 민중가요가 발전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는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20년을 민중민족 문예운동으로 일관했는데 되돌아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민중이 있는 한 민중가요는 필요하고 민중을 위한 시와 노래는 필요하다. 어떤 형태든 현 시기 민중에 맞는, 민중이 이해 못하더라도 때로는 교양할 필요도 있고 문화전사로서 밀고 갈 필요가 있고 그것이 감동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변화된 시기 민중음악이 다른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객관적이고 민중정서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민중가요라고 정리돼서 지금도 그 장르가 있고 지금도 스스로 민중가요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가요가 계속 질적 발전 과정 제대로 밟지는 못했다. 활동 창작단위가 새로운 국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예전 표현으로 좀더 전투적 모습으로 변화된 정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인자들을 발굴하고 실력자들이 후대에서 계속 나와줘야 한다.
기존 지키던 사람들만 계속 지키고 있으면 인생의 싸이클처럼 하락곡선을 계속 걷다가 민중이 바닥칠 때, 민중의 요구가 많아질 때까지 자연발생적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는가. 헤쳐 나가고 민중에게 녹아나는 음악을 해줬으면, 변화된 시기 좋아하는 음악을 과감히 채택하고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음악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 그간 개인적인 어려움도 많았을텐데
■ 항상 똑같이 어려우니까 어려움을 밥처럼 먹고 사니까, 고난과 시련이 개인에게 주어진 길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고 쭉 와서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있다가 없어지면 힘들기도 할텐데 25년동안 줄기차게 똑같은 생활이다 보니까 그것도 관성이 되는 것 같다. 딱히 어렵다기 보다는 생활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더라.
□ 그간 많을 분들을 만났을텐데. 꼭 떠올리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 예술적인 면에서는 김남주 선배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실질적으로 초창기 작품은 남주형 작품인지 저의 작품인지 독자가 모를 정도로 20대 습작기 때는 한창 연습하고. 현실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책장이 떨어질 정도로 시집을 읽었고.
문학상에 부끄럽게 내봤는데 심사위원장인 김남주 선배가 뽑아줘 시를 쓸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예술 면에서는 그분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이다.
운동선상에서는 가까이 수없이 많은 동지를 뵜지만 가까이 어버이처럼 같이 살았던 분들이 남는다. 좀더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가셔서... 어버이 뻘이지만 동치처럼 친형처럼 많이 의지하게 되고 어버이처럼 의지하기도 한 류락진 선생이 마음에 남는다.
“김남주 선배와 류락진 선생 마음에 남는다”
▲ 그는 예술활동의 스승은 김남주 시인이라고 밝혔다. [사진출처 - 박종화 홈페이지]
□ 문화 쪽에서 쭉 활동해 왔는데 이른바 ‘딴따라’ 기질 같은 것은 없었나?
■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외려 태어나면서, 살아오면서 족적이 그래서인지 전사적 기질이 있지 예술적 기질은 없는 것 같다. 많이 노력하고 제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적 정서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데 남들보다 덜 게을리 했던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 좋은 의미의 기질을 말했는데, 다소 부정적인 ‘리버랄’한 조직과 융합하지 못하는 그런 기질을 물었다.
■ 아무래도 있다. 조금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고 동전의 뒷면도 봐야 되는 게 예술가적 기질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이 보아서는 담배꽁초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될 수 없다.
조직생활은 사무국장이나 집행위원장을 맡겨놓고 시 쓰고 노래하라면 어려움이 많다. 현실적으로 자유롭게 내비쳐지는 측면들이 있지 않겠는가.
□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안다. 술, 담배를 좋아하나?
■ 술 많이 먹으면 하도 많이 먹고 실수도 많이 하고 한번 먹으면 10박, 20박 아무 일도 안하고 대작하는 사람만 바뀌고 나는 똑 같고...
그때 그런 시절 돌이켜 보면 미치지 않고 오늘 하루와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는 치열하게 살아온 시절에 술이라는 친구가 몸을 혹사시키는 대상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술 때문에 버티기도 하고 밤에 날새서 작업하는데 담배피면서 생각하고 사색하고 이랬던 나름대로 좋은 점은 있었다. 노래 속에서도 ‘술 마시고 싶을 때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라는 구절도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젊음과 열정을 다 태워보고 사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미다. 술이라는 것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지금은 술 때문에 몸이 엄청 망가졌지만, 최소한의 신진대사로 100년 사느니 혹사시켜 가면서 50년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술이 주는 약리적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고민과 방황, 쓸데없는 풀리지 않는 고민, 술이 친구처럼 고민을 희석시켜주기도 하고. 지금 그때처럼 먹으라면 먹을 수 없겠지만.
□ 이번 기념공연에 ‘골수팬’들이 왔다고 했다고 했는데, 어떤 이들인가?
■ 광주나 서울이나 좀 있다. 제가 하는 일, 제가 만드는 작품에 의의나 토를 달지 않고, 어렵고 힘들 때 같이 있어준 동지들이다. 팬이라면 너무 가볍고 그런 분들 때문에 버텨왔다.
연봉 200만원도 안 되는 가난한 민중가요 작곡가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걷어서 도와주고 그런 분들만 온 것이다. 거기에 왔던 동지들이나 공연하는 저나 마음이 똑 같은 거다. 내가 안타까우면 그들도 안타까워하고...
수는 적었지만 알찬 공연, 그것만으로 만족하자고 생각했다.
“문예강연보다 통일강연을 더 많이 나갔다”
▲ 그의 말투에는 전라도 억양이 배어있고 그의 눈빛에는 시인의 우수가 어려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가족들은 어떻게 되나?
■ 쌍둥이 아들 둘이 는데, 자기들 음반도 낸 적이 있다. 광복 60주년 기념 통일노래다. 인터뷰를 엄청 많이 했는데 스트레스를 받았다. 심지어 조선일보가 학교까지 찾아가 3일동안 학교를 안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준비해 5학년 3월달에 발표했는데, 애들이라 노래부르는 것 싫어하고 글쓰는 것도 많이 가르치고 가사도 써보게 하고 직접 쓴 가사로 아빠가 곡을 붙여서 내준 적이 있다. 자기들이 크면 그 앨범 한 장이 가치가 있겠지만 지금은 모르는 것 같다.
지금 공연 하자하면 안 한다. 20주년 기념공연 게스트로 한번 해달라 해도 안 한다. 노래하는 것을 안 좋아하는데 노래는 잘한다.
□ 지금 시집이나 음반을 준비중인 것이 있나?
■ 없다. 조금 쉬면서 구상해보려 한다.
□ 통일 문제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
■ 학생운동 하면서부터 광주라는 기질도 그렇고 전남대라는 기질도 그렇고, 학생 때부터 통일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분위기였다. 통일 세미나나 학습을 많이 하고 자연스럽게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래 창작 발표하면서도 문예강연보다 통일강연을 더 많이 나갔다.
꾸준히 통일 관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범민련 사업을 초창기 때부터, 20대부터 쭉 관여하다보니까 통일사업과 밀접하게 연관돼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직책을 맡고 있나?
■ 중앙위원이고, 지역에서는 광주전남본부 부의장이다.
□ 북에 가서 공연한 적은 없나?
“맡은 일에 살아있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
▲ 새로운 모색을 하며 미래를 구상하고 있다는 박종화 시인.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공연한 적 없다. 공연하고 싶었는데 할 기회가 없었다.
첫 번째 2001년 8.15행사에 갔을 때 7박 8일간 갔다가 강정구 교수와 함께 구속된 6명 중에 한 명이었다. 어처구니없이 걸려들어 가지고... 그 이후 금강산만 갔다 왔다.
지금은 자격정지, 집행유예기간이다. (2000년 8.15행사)그 건이다. 이번 5월에 상고 취하를 했다. 문재룡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5명이 대법 상고중이다. 5년이 지나도 재판을 안 붙여줘 저는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상고를 취하했다. 취하하면 바로 확정되는데, 몇 년인지도 잊어버렸는데 자격정지와 집행유예 기간이다. 재판을 늦게 붙이면 그게 문제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줄기차게 통일의 한길로 달려오신 분들 많은데, 그리고 그 치열했던 순간에도 남과 북이 모여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미친놈, 빨갱이라고 했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결국 수많은 사람이 평양을 가고 있다. 우리 싸움이 가장 합당하고 정당한 통일투쟁이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빨리 가서가 아니라 기득권 보수세력이 이권과 권력, 부를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우리를 핍박, 억압했기 때문에 그랬지만 결국 민중의 힘을 당해내기 못하고 오고가고 있다.
국가보안법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지금은 서서히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이 돈만 있으면 평양 가듯이 많은 공감을 얻어 없어질 수 밖에 없다. 사상, 생각, 정견의 자유가 넘치는 세상은 얼마가지 않아 올 수 밖에 없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힘내서 자기가 맡은 일을 살아있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줄기차게 자기 삶을 유지시켜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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