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13 11:49

따뜻한 사람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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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사람끼리

단이와 결이를 데리고 노동자 대회장인 경희대를 갔다
날씨가 허버춥다(단이표현)
대충 옷을 입혀온 탓인가 요놈들이 추위를 탄다
오기 전에 석윤님과 통화가 되어 단이와 결이와 함께 간다고 말했는데
추운 날씨에 떨고 있어야 할 다니와 겨리를 생각해서
손수 만드신 (개량한복 공장 운영)목도리 두개를 가방에 싸오셨다
아무 것도 아닌 일
아주 사소한 일로도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살면서 내내 체험하고도 또 잊고 사는 나를
더 더욱 초라하게까지 만들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깃발이 휘날리고
마이크를 잡고 무어라 외쳐대는 사람을 보고도
이젠 이골이 났는지 재미있어 한다
아빠 왜 저사람은 마이크를 들고 저렇게 악을 쓰는 거야  
라는 질문도 하지 않는다
저렇게 큰 깃발을 무거워서 어떻게 들어 라고도 묻지 않는다
외려 구경하고 싶다고 스탠드에 들어가 앉자고 한다
100여명의 풍물꾼들이 풍물을 치니까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저씨들이 앞을 가로막으니까 고개를 둘레거리며 쳐다보더니
급기야 아저씨 안보여요 비켜주세요 라고 소리친다
어느새 추위를 잊어버렸나 보다

구경이 끝나고 주점에 들어가서 동지들과 술을 마셨다
아이들은 석윤님이 사주신 돈가스를 먹었는데도
다시 라면 한그릇을 단숨에 먹어치웠다
주막에서 내내 아빠  심심해 라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오랫만에 만난 동지들과의 대화가 좋은데
어떻게 자리를 정리 할 수 있단 말인가
십 수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이 동지의 따수운 정을 부어주는
인식이를 비롯한 구로의 동지들과
처음보는 얼굴인데도 따뜻하게 선배 대접을 해주는 한청 식구들과
조금은 낮설듯 싶은데도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친근함을
보여주며 어울려주시는 석윤님과
그렇게 노동자대회 전야제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이들때문에 구로동지에게는 차를 가져오라하고 오늘은 니집에 가서 아이들 재워야 겠다고 말해놓고
무슨 놀보심보인지 나는 술을 마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져
술마시고 오늘 여관에서 자자고 했다
그리고 같이 술을 마셨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지고 밤도 따라 깊어지고 판을 정리하고 나오면서 꽃다지 식구만나 술한잔 희망새 식구만나 술한잔 우리나라식구들 만나 술한잔
참 고놈의 한잔이 백잔은 된듯 싶다
취하면 실수하고 실수하면 아침에 후회하고
뭐 세상이 그런건가 고민하면서도 매냥 그러기를 하루이틀인가?
거친 나의 말투 때문에 처음보는 이들은 거부감을 많이 갖는다는 걸 알면서도
80년대식 폐차장 뒷골목 문화나 유행같은 우리들의 방식으로
술을 마시고  술판은 그렇게 끝나갔다

차를 몰고 여관을 찾으러 나선다
학교주변에 그렇게 많은 여관들이 빈방 하나 없다
서울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이길레 두시간을 헤매고 돌아 다녀도 빈방하나 없는 건가
아니면 노동자대회 참석자들이 전부 여관에 자러 들어 간건가
이해할 수 없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돌아다니다 겨우 방을 구했다
주말이라 4만원씩에 방 두개를 구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이왕 방이 두개가 되었으니 밖에서 추위에 떠는 동지들을 데려와 자자고 했다
그리고는 사들고 온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동렬이가 사들고 온 맥주를 모조리 깨뜨려 버려 다시 사와야 할 지경이 되었다
술봉다리를 들고 여관에 들어서면서 앞으로 꼬꾸라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완전히 다리가 풀린 상태에서 술병을 앞에다 대고
그 앞으로 슬라이딩을 해버렸다
온 몸에는 깨진 병조각이 난무하게 달라붙어있고
석윤님과 나는 벗겨서 털고 또 털고
그렇게 하룻밤이 져 간다
몇몇의 동지들을 데려오겠다고 나간 인식이는
아침 6시가 되어서야 술에 떡이 돼 들어온다
인식이는 오늘 마누라있는 곳으로 데리러 간다고 말해놓고 종화형 아이들이 경희대에 있으니 당신한테는 못가고 단결이 데리러 가야겠다고 핑게대고(사실은 갈 수 있었을텐데 괜히)
마누라는 성질나고 ...

완전히 아침 날이 밝았다
눈을 떠보니 10시가 다 된 것같았다
아이들은 이미 일어나서 테레비를 보고있다
이 녀석들이 어제 테레비에서 뭘 봤을까
우리가 잡은 두 개의 방 중에서 한 곳에서 저희들끼리 자라고 하고 우리는 옆방에서 술 한 잔을 더하고 있었는데
술 마시다 걱정이 돼서 옆방으로 와보니 단이는 잠을 자지않고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놈의 테레비는 별의 별 채널이 다 있어서 또 머신가 남녀가 색쓰는 영화들을 신나게 틀어놔서 채널 돌리면 다 보았을텐데 걱정이다
아들녀석 거짓말장이 만들기 싫어서
어디 채널 돌렸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다음에 여관 데려갈 땐 조심해야겠다

이미 나갈 준비를 다 끝내고 아빠가 일어나길 기다리던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석윤님과 여관을 나섰다
나머지 동지들은 방바닥에 뻐드러져 일어날 기색이 없다
야 !
해장하러 가자 아무리 소리쳐도
누운채로 형 잘 가세요 그야말로 시체가 되어 입만 뻥긋거린다
완전히 붕어가 따로 없다
하는 수 없이 우리 네사람만 구수한 청국장을 해장으로 맛있게 아침식사를 했다
맥주도 댓병 해장으로 곁들였다
그야말로 신나는 하룻밤이었다
그 분위기
그 따뜻한 사람들
아직도 우리에게 이런 체력이 남았는가
아직도 우리에게 분노가 남았는가
아직도 동지사랑을 아무런 조건없이 할 수 있는가
대답은 그대로였다
풋풋한 청춘 그대로였다
어찌 10여년전의 체력과 같을 수 있겠는가만은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가슴 따뜻한 사람을 만나면
단 한사람과의 인연일지라도
행복한 하루를 만들수 있음을 우리는 몸으로 느꼈다
저녁에 들어와야 할 사람이 들어오지 않자 석윤님집에서도 걱정이 태산이다
집안 문제도 많은 것 같은 석윤님에게 집에서 계속해서 전화가 온다
아침에까지 전화가 온다
나를 바꿔준다
남편이 즐거워 하는 일에 고스란히 자신의 마음을 얹어 놓은듯한 음성이  정말 좋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끊는다
아침까지  아니 더 있어도  다 좋은데요
제발 광주까지 데려가진 마세요
ㅋㅋㅋㅋ

밤을 낮삼아 술을 마셨으니 걱정이 많았겠지만
부인께선 나의 악명을 조금은 들었나 보다
자칫 잘못하다가 광주까지 데려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또 하루가 다 간다
그리고 비행기를 예약하고
두 시 비행기였는데 놓쳐 버렸다
사정해서 3시 비행기 좌석을 하나 얻어타고
지겹기도 지겨운 광주땅을 들어서니
왜 이리 포근한가
지겨운 곳도 포근할 때가 있는가
?
  • ?
    늘푸른꿈 2002.11.14 11:24
    음~
    결국 걱정하던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군^&^
    처가집에 가니 콩나물에 북어도 넣고 얼큰하게, 따숩게
    준비를 해 놓고 있어
    좋았지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나오지 못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이거 이러다 짐 싸서 내려가
    책임지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단이와 결이는 감기 안 걸렸는지 모르겠네요
    체력도 좋고 씩씩한 녀석이 둘이나 있어
    든든하지요?
    나중에 신세 지려면 지금부터 잘해야 돼요
    아이들은 다 기억하고 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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