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종 화(라이터 겸 시인)
1963년 광주 출생
1982년 금호고등학교 졸,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입학
1988년 자신의 민중가요 작곡 1집을 테잎을 제작하면서 음악활동 시작
1989년 작곡2집 [바쳐야 한다] 발표,
1990년 작곡3집 [고난의 행군] 발표로 국가보압법 위반(징역1년 6월)
5.18 광주민중항쟁 10주년 기념공연<다시 오월로 일어나>창작공연
1992년 작곡4집 [갈길은 간다] 발표
1993년 작곡4집 <종화가 만난 미영이의 인생만들기> 앨범 발표
1994년 작곡5집 <시하나 노래하나> 발표
1995년 작곡6집 <사람들> 발표
1996년 싱어송 라이터 앨범1 <혼자만 살았다는 기분> 앨범 발표
1998년 싱어송 라이터 앨범2 <아빠의 노래> 앨범 발표
1999년 창작관현악1 <청춘으로 일어서는 오월> (광주전남심포니오케스트라) 의 연주로 공연
2000년 창작관현악2 <오월에서 통일로> (안산시교향악단,
광주전남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으로 공연)
2001년 자신의 창작곡으로 <잡은 손 놓지말자>의 앨범 발표
1988년 이 후 15년 동안 30여 차례의 단독공연과 300여 곡의 창작곡을 발표
대표곡 : 우물안 개구리(안치환7집), 파랑새(노래마을2집),
소풍갈란다(류영대2집), 등등
1992년 심산문학상의 입선으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겸함
저서 : 제1시집 [바쳐야한다]-92년 두리/
제2시집 [서글픈 고정관념]-2000년 시와사회/
제3시집 [지금도 만나고 있다]-2002년 두리/ 등 출간
노래이론서 [나의사랑 나의노래] 1991년 출간
산문집 [노래와 함께 사색과 함께] 1993년 출간
현재 : 한국민족음악협회, 광주전남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민예총광주지회음악위원, 범민련중앙위원 등으로 활동 중
종화는요
1963년 빛고을 광주에서 태어났답니다. 엄마의 생일 맞이 30분을 못넘기고 12월 4일 밤 11시 32분에 3남 2녀중 셋째로 태어 났어요. 그래서 엄마와 난 생일이 하루 차이랍니다. 이 후 줄곧 전라도 광주를 배경으로 살아 왔어요.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해 봐야 힘겨운 날들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네요. 초등학교 시절, 아빠는 지병으로 돌아 가시고 엄마의 고된 노동으로 살아 오기가 약간 미안했겠지요.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 볼 때 가장 큰 것은 누가 뭐래도 80년 광주민중항쟁이겠지요. 5.18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광주는 대사변을 예고 하고 있었어요. 수많은 대학생 형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를 하는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으니까요. 그 때 데모 행렬을 보는 순간 나는 얼마나 큰 놀라움을 가졌는지 몰라요. 그리고 내가 살아 온 지금까지의 생활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까지 고민이 이르게 되었지요. 그야 학생들이 데모하는 광경을 난생 처음 봤으니까 그랬겠지요. 그저 학교에나 잘 다니고 아이들 하고 노는 것 밖엔 아는 것이 없었던 저로서는 80년 5.18이 너무나 큰 공포였답니다. 이런 데모의 연속이던 날이 지속되면서 급기야 5.18은 터지고 말았지요.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지고 나는 뒤돌아 볼 틈도 없이 도청으로 나왔답니다 그리하여 데모행렬에 가담하게 되었고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이 그 독한 최루가스를 마셔가며 시민과 함께 했지요. 도청을 함락하고 나서 나는 시민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교도소 진격을 나가게 되었지요. 주동인물이 버스안에서 총을 나눠 주었어요. 엉겹 결에 받아 쥔 총이 바로 칼빈 총이었답니다. 태어나서 처음 실탄을 쏘아봤던 경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삶의 결정적 지표를 던져 준 해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5.18때 가장 마음 아프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정권이 거짓을 말하여 국민을 속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말하고 다른 시,도에는 일부 폭도들이 난리를 펴는 거라고 말입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유일하게 진실 된 보도를 하고 있는 방송이 있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이북방송이었답니다. 어린 마음에 이북방송에서 나오는 뉴스가 어쩜 이리도 정확하게 보도 하는지 신기하게 생각되었고 나 뿐 아니라 시민들은 이북방송을 많이 들었어요. 우리의 방송은 두절시켜 버린(방송해 봐야 전부 거짓말) 상태라 공중파의 공백이 생긴 거죠. 그래서인지 이북방송은 광주 어디서나 선명하게 들렸어요. 나는 결심했어요. 고등학생의 나이에서 정의로운 삶을 생각해 봐야 얼마나 했겠습니까만은 그 때 당시에는 큰 결심이었답니다. 그 것은 바로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자가 될 것을 결심했던 거예요. 그리고 대학은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어요. 참 순진했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수준의 생각이나 될까 몰라?
어쨓든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들어오기 전부터 최소한 나는 대학의 낭만이랄지 하는 것들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입학한 지 3일만에 고등학교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데모 제일 잘하는 동아리가 어디냐구요. 그래서 들어 간 곳이 탈춤반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 탈춤반의 명성은 모두가 알아주는 운동권 명성이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탈춤반 모두가 그렇게 각단졌겠어요. 그 중에는 사깃꾼도 있을 것이고 뭐 그랬겠지만 시체말로 물이 좋은 동아리였답니다. 탈춤과 나는 참 거리가 멀었어요. 왜 그런 건지 몰라도 탈춤은 하기가 싫었어요. 우리의 민족적인 것이기에 다 들 좋아하는 그 시절의 유행에 의하면 좋아 할 만도 한데, 나는 그렇지 못했어요. 내 몸에는 맞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악착같이 어울렸어요. 그 해 대학 1학년 오월이 되자 오월 학살자 처단 집회를 따라 거리로 나갔어요. 82년 오월은 지금의 오월과 너무나 차이가 많았지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탄압이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대학 본부 건물 밑에서 정보기관이 숙식하며 사찰하던 시기였으니까요. 페퍼포그 차량이 언제든지 도서관 앞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오월데모를 시작했고 나는 여지없이 잡혔지요. 서광주 경찰서(전남대 담당)로 연행되어갔습니다. 대학 들어 온지 2달만의 일이었답니다. 조사가 끝나면 어떻게 되려나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일 학년 이어선지 훈방조치를 받았어요.
이 후 오월항쟁의 불을 당겼던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선배는 검거되고 광주교도소에서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박관현 형은 사늘한 시체로 숨을 거두어야 했고 박관현 부활 투쟁은 그 해 가을을 서럽게 물들였습니다. 가열 찬 투쟁을 벌리고자 거리로 뛰쳐 나왔고 또다시 저는 검거 되고 말았어요. 그 당시 시위대 자체가 소수였기 때문에 잡히기도 잘했나 봐요. 다시 조사를 받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유치장 시절이 며칠 간 계속되더니 다시 자리를 이동 시키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이동한 곳은 바로 도청 지하실이었어요. 두 눈 가리운 채 암흑차량을 타고 간 현실에 어딘지도 몰랐지만 도착하면서 다들 도청임을 직감했어요. 2년 만에 도청 지하실을 다시 구경하게 되었지요. 5.18 당시 들어와 남들 따라 내려와 본 적이 사실 있었거든요. 그 곳에는 도청 진입시에 탈취한 경찰과 군인의 물품이 가득했던 기억을 아직도 떠올리거든요. 점점 더 불안해 졌어요. 말이 대학생이지 1학년의 심정은 4학년 형들과는 사뭇 달랐겠지요. 그래도 나름대로 의연하게 대처했고 조사투쟁도 당당하게 했어요. 선배들은 내가 틀림없이 구속될 거라고 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20여일이 지나서 풀려 났답니다. 참 운이 좋은 놈이었나 봐요.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대목은 왜 우릴 도청 지하실로 이동시켰는지 하는 거예요.
이렇듯 나의 대학 시절의 출발은 앞으로 삶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복잡다난하고 박터지는 내부 논쟁등에 휩싸이기도 하면서 4년 동안 줄기찬 투쟁을 동지들과 함께 했습니다. 여기서는 말 못할 고통들도 동지들간에 나타나기도 했고 결국 대학생활 4년만에 1학년 밖에 못마친 채로 군대를 가게 되었어요.
강원도 철원에서 군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나를 반긴 건 87년 대투쟁이었어요. 조금이라도 쉴 겨를도 없이 또 거리로 나서게 되었어요. 밤과 낮이 없이 계속되던 호헌철폐투쟁은 정말 신이 났어요. 군대에서 나오자 마자 온통 거리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힘든 날들이었지만 정말 신나는 데모행렬에 동참했지요. 그리고는 복학 후 87년 대선 공정선거 감시단 동구위원장을 맡아서 투쟁하였어요. 88년엔 전남대 예비역협의회 건설준비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자기 계산속에서만 놀고자 하는 군 제대자들이 당당한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했어요. 그 해 나는 88년 오월학살원흉 미제 및 전두환 노태우 처단을 위한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서 위원 중 맡형으로서 오월투쟁을 주동하였습니다. 예비군복을 입고 나가서 투쟁을 하고 마이크를 잡고 화염병을 던지는 일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예비역이 저럴 수 있나 하는 찬사와 함께 여학생들에게도 인기 캡이었답니다. 신나는 오월투쟁을 마감하니 6월 조국통일투쟁사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차피 오월특위로 수배 된 상태인데 못할 것이 없었지요. 하여 전대협에 전남대 오투위 명으로 통일결사대를 제안했답니다. 순수한 민간그룹의 통일논의 보장과 남북교류를 보장하라는 요지를 갖고 결사대를 전국적 차원에서 꾸렸어요. 물론 광주는 오월학살 진상규명의 문제를 더 제기 했지요. 80여명의 결사대 이름으로 통일부 장관 면담을 신청했고 싸움을 계획했어요. 아무런 반응없이 무시하는 정부 놈들을 모조리 태워버릴 양으로 세종로 소재 정부종합청사 불지르기 작전을 전개 하였습니다. 진격하여 화염병을 던지고 농성하던 중 다시 검거되고 몸도 많이 다치게 되어 경찰병원 신세를 지고 다시 징역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복무하던 중에 특별사면이 있었어요. 그 기회로 석방이 되어 7개월의 징역 생활을 마치고 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하였지요.
출소 하기 전 징역을 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치열한 시대의 한 역사를 보듬고 살아가는 젊은이의 삶과 의지를 가다듬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어요. 좀 더 차분하게 나를 정리해 보았지요. 그 때 나를 정리 해 볼 수 있는 도구로 선택한 게 바로 노래와 시였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나 많고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으로 되어 서로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힘을 줄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것 중의 으뜸은 바로 시요 노래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여 별 실력도 없는 놈이 젊음과 패기 하나로 달려들었던 거예요. 초등학교 음악 책을 청계천에서 사다가 영치시키라고 해서 음악 이론 공부를 했고 볼펜이 없던 시절인지라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필기 할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하고 글을 적어갔던 겁니다. 그 중의 으뜸인 무기는 바로 못이였어요. 간간이 운동 나가 주워 온 못은 긁어 파기가 참 좋거든요. 우윳곽을 까서 거기에 눌러쓰면 제격이지요. 그렇게 글을 쓰며 시 쓰는 연습을 했고 노래를 만드는 연습을 하였어요. 그리고 3시간정도의 수면(학습을 위해)과 틈만 나면 벌어지는 단식투쟁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했고 결국 출소하면서 가지고 나온 곡이 약 200여 곡이나 되었답니다. 그 중에서 20곡을 선별하여 발표한 노래가 바로 분노테이프이고 나를 유명(?)하게 한 장본인의 노래랍니다. 그 때 징역에서 악보조차 제대로 그리기 힘든 징역에서 잉태 된 노래 중에는 [파랑새] [지리산] [여성전사] [나의사랑] [분노]등이 있었어요. 그 당시의 만들었던 노래가 내가 만든 노래 중의 으뜸이라 할만하지요.
출소 후에는 창작된 노래를 가지고 앨범을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그리고 한 후배가 아버지 몰래 소를 끌고 와 팔아서 빌려 준 돈으로 앨범을 만들었어요. 몇날 며칠이 지나고 학교에 잠시 나가보던 어느 날, 5.18광장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학우들이 집회하면서 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그 때의 감정, 여러분은 아시겠어요. 상업적으로 인기에 영합하여 노래 한 곡 히트시키려고 만들고 부르는 자들은 죽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예요. 정말로 너무나 큰 감격이었어요. 그 때부터 나의 노래 인생 길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게 되었고, 이 후 3집 4집을 연거푸 내면서 [투쟁의 한길로] [바쳐야 한다]를 발표하게 되었어요.
이 즈음에 다시 나는 징역을 갈 고비를 맞게 됩니다. 3집의 [고난의 행군]이 문제가 되었지요. 전국적인 차원에서 나를 검거하려는 준동이 시작되었고 나는 앨범출시 하자마자 도바리(잠적)를 쳐 버렸는데도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곧 검거되고 말았어요. [고난의 행군]은 항일무장투쟁사를 그린 노래에요. 항일무장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을 드러냈고 북쪽의 항일투쟁까지 다루었기 때문에 이적 표현물이란 요지였어요. 결국 국가 보안법이라는 굴레로 징역 1년 6개월을 살았어요.
92년 출소 하자 마자 '출옥밤을 걷다가'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 후 [갈길은 간다]라는 앨범을 냈어요. 이 때 나온 노래는 물론 [갈 길은 간다] 였어요. 이 후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에게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을 가져다 주었고 나의 노래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였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럴 때 마다 나를 다잡을 수 있게 했던 가장 큰 동지는 바로 노래였어요. 정말로 힘들고 괴롭고 좌절하고 싶을 때는 노래를 불렀어요. 작업실에 문을 잠가놓고 10시간 가까이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불렀어요. 그 중에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갈길은 간다' 였답니다. 부르고 또 부르면서 나태해지지 않으려 했고 좀더 잘 만드는 노래보다는 투박하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며 실천하는 쪽을 택하는 창작과정을 지속시켜 왔어요. 90년대 중반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남은 것은 해골 밖에 없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 것이 운명이라면 쓰러지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네요.
2001년에는 평양을 다녀 왔어요. 사진들을 다 빼앗겨서 소개할 수 없지만 재판이 끝나면 받아와서 여러분께 소개 할래요(현재 재판 진행 중). 대부분 아시는 문제이니 더는 말하지 않겠어요. 7박8일 동안에 있었던 평양에서의 일은 나의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있으니 보아 주세요. 평양에서 돌아오자 마자 국정원으로 연행되었지만 결국 우리의 정당성이 인정되어 금보석으로 나왔어요. 분단이 후 잠입탈출이라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금보석은 아마 우리들이 처음일 거예요.
쓰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별 생각없이 쓰다보니 주절주절 잔소리가 길어 졌어요. 여러분이 나를 아는데 쬐끔은 도움이 되셨나 모르겠네요. 만 페이지를 다 써도 못다 할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할 순 없고 주제에 따라서 앞으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눌까해요. 그럼 이만해도 되겠지요.
언제 어디서나 건투를 빕니다.
2002년 여름
박종화 씀
1963년 광주 출생
1982년 금호고등학교 졸,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입학
1988년 자신의 민중가요 작곡 1집을 테잎을 제작하면서 음악활동 시작
1989년 작곡2집 [바쳐야 한다] 발표,
1990년 작곡3집 [고난의 행군] 발표로 국가보압법 위반(징역1년 6월)
5.18 광주민중항쟁 10주년 기념공연<다시 오월로 일어나>창작공연
1992년 작곡4집 [갈길은 간다] 발표
1993년 작곡4집 <종화가 만난 미영이의 인생만들기> 앨범 발표
1994년 작곡5집 <시하나 노래하나> 발표
1995년 작곡6집 <사람들> 발표
1996년 싱어송 라이터 앨범1 <혼자만 살았다는 기분> 앨범 발표
1998년 싱어송 라이터 앨범2 <아빠의 노래> 앨범 발표
1999년 창작관현악1 <청춘으로 일어서는 오월> (광주전남심포니오케스트라) 의 연주로 공연
2000년 창작관현악2 <오월에서 통일로> (안산시교향악단,
광주전남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으로 공연)
2001년 자신의 창작곡으로 <잡은 손 놓지말자>의 앨범 발표
1988년 이 후 15년 동안 30여 차례의 단독공연과 300여 곡의 창작곡을 발표
대표곡 : 우물안 개구리(안치환7집), 파랑새(노래마을2집),
소풍갈란다(류영대2집), 등등
1992년 심산문학상의 입선으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겸함
저서 : 제1시집 [바쳐야한다]-92년 두리/
제2시집 [서글픈 고정관념]-2000년 시와사회/
제3시집 [지금도 만나고 있다]-2002년 두리/ 등 출간
노래이론서 [나의사랑 나의노래] 1991년 출간
산문집 [노래와 함께 사색과 함께] 1993년 출간
현재 : 한국민족음악협회, 광주전남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민예총광주지회음악위원, 범민련중앙위원 등으로 활동 중
종화는요
1963년 빛고을 광주에서 태어났답니다. 엄마의 생일 맞이 30분을 못넘기고 12월 4일 밤 11시 32분에 3남 2녀중 셋째로 태어 났어요. 그래서 엄마와 난 생일이 하루 차이랍니다. 이 후 줄곧 전라도 광주를 배경으로 살아 왔어요.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해 봐야 힘겨운 날들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네요. 초등학교 시절, 아빠는 지병으로 돌아 가시고 엄마의 고된 노동으로 살아 오기가 약간 미안했겠지요.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 볼 때 가장 큰 것은 누가 뭐래도 80년 광주민중항쟁이겠지요. 5.18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광주는 대사변을 예고 하고 있었어요. 수많은 대학생 형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를 하는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으니까요. 그 때 데모 행렬을 보는 순간 나는 얼마나 큰 놀라움을 가졌는지 몰라요. 그리고 내가 살아 온 지금까지의 생활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까지 고민이 이르게 되었지요. 그야 학생들이 데모하는 광경을 난생 처음 봤으니까 그랬겠지요. 그저 학교에나 잘 다니고 아이들 하고 노는 것 밖엔 아는 것이 없었던 저로서는 80년 5.18이 너무나 큰 공포였답니다. 이런 데모의 연속이던 날이 지속되면서 급기야 5.18은 터지고 말았지요.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지고 나는 뒤돌아 볼 틈도 없이 도청으로 나왔답니다 그리하여 데모행렬에 가담하게 되었고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이 그 독한 최루가스를 마셔가며 시민과 함께 했지요. 도청을 함락하고 나서 나는 시민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교도소 진격을 나가게 되었지요. 주동인물이 버스안에서 총을 나눠 주었어요. 엉겹 결에 받아 쥔 총이 바로 칼빈 총이었답니다. 태어나서 처음 실탄을 쏘아봤던 경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삶의 결정적 지표를 던져 준 해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5.18때 가장 마음 아프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정권이 거짓을 말하여 국민을 속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말하고 다른 시,도에는 일부 폭도들이 난리를 펴는 거라고 말입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유일하게 진실 된 보도를 하고 있는 방송이 있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이북방송이었답니다. 어린 마음에 이북방송에서 나오는 뉴스가 어쩜 이리도 정확하게 보도 하는지 신기하게 생각되었고 나 뿐 아니라 시민들은 이북방송을 많이 들었어요. 우리의 방송은 두절시켜 버린(방송해 봐야 전부 거짓말) 상태라 공중파의 공백이 생긴 거죠. 그래서인지 이북방송은 광주 어디서나 선명하게 들렸어요. 나는 결심했어요. 고등학생의 나이에서 정의로운 삶을 생각해 봐야 얼마나 했겠습니까만은 그 때 당시에는 큰 결심이었답니다. 그 것은 바로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자가 될 것을 결심했던 거예요. 그리고 대학은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어요. 참 순진했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수준의 생각이나 될까 몰라?
어쨓든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들어오기 전부터 최소한 나는 대학의 낭만이랄지 하는 것들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입학한 지 3일만에 고등학교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데모 제일 잘하는 동아리가 어디냐구요. 그래서 들어 간 곳이 탈춤반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 탈춤반의 명성은 모두가 알아주는 운동권 명성이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탈춤반 모두가 그렇게 각단졌겠어요. 그 중에는 사깃꾼도 있을 것이고 뭐 그랬겠지만 시체말로 물이 좋은 동아리였답니다. 탈춤과 나는 참 거리가 멀었어요. 왜 그런 건지 몰라도 탈춤은 하기가 싫었어요. 우리의 민족적인 것이기에 다 들 좋아하는 그 시절의 유행에 의하면 좋아 할 만도 한데, 나는 그렇지 못했어요. 내 몸에는 맞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악착같이 어울렸어요. 그 해 대학 1학년 오월이 되자 오월 학살자 처단 집회를 따라 거리로 나갔어요. 82년 오월은 지금의 오월과 너무나 차이가 많았지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탄압이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대학 본부 건물 밑에서 정보기관이 숙식하며 사찰하던 시기였으니까요. 페퍼포그 차량이 언제든지 도서관 앞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오월데모를 시작했고 나는 여지없이 잡혔지요. 서광주 경찰서(전남대 담당)로 연행되어갔습니다. 대학 들어 온지 2달만의 일이었답니다. 조사가 끝나면 어떻게 되려나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일 학년 이어선지 훈방조치를 받았어요.
이 후 오월항쟁의 불을 당겼던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선배는 검거되고 광주교도소에서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박관현 형은 사늘한 시체로 숨을 거두어야 했고 박관현 부활 투쟁은 그 해 가을을 서럽게 물들였습니다. 가열 찬 투쟁을 벌리고자 거리로 뛰쳐 나왔고 또다시 저는 검거 되고 말았어요. 그 당시 시위대 자체가 소수였기 때문에 잡히기도 잘했나 봐요. 다시 조사를 받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유치장 시절이 며칠 간 계속되더니 다시 자리를 이동 시키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이동한 곳은 바로 도청 지하실이었어요. 두 눈 가리운 채 암흑차량을 타고 간 현실에 어딘지도 몰랐지만 도착하면서 다들 도청임을 직감했어요. 2년 만에 도청 지하실을 다시 구경하게 되었지요. 5.18 당시 들어와 남들 따라 내려와 본 적이 사실 있었거든요. 그 곳에는 도청 진입시에 탈취한 경찰과 군인의 물품이 가득했던 기억을 아직도 떠올리거든요. 점점 더 불안해 졌어요. 말이 대학생이지 1학년의 심정은 4학년 형들과는 사뭇 달랐겠지요. 그래도 나름대로 의연하게 대처했고 조사투쟁도 당당하게 했어요. 선배들은 내가 틀림없이 구속될 거라고 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20여일이 지나서 풀려 났답니다. 참 운이 좋은 놈이었나 봐요.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대목은 왜 우릴 도청 지하실로 이동시켰는지 하는 거예요.
이렇듯 나의 대학 시절의 출발은 앞으로 삶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복잡다난하고 박터지는 내부 논쟁등에 휩싸이기도 하면서 4년 동안 줄기찬 투쟁을 동지들과 함께 했습니다. 여기서는 말 못할 고통들도 동지들간에 나타나기도 했고 결국 대학생활 4년만에 1학년 밖에 못마친 채로 군대를 가게 되었어요.
강원도 철원에서 군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나를 반긴 건 87년 대투쟁이었어요. 조금이라도 쉴 겨를도 없이 또 거리로 나서게 되었어요. 밤과 낮이 없이 계속되던 호헌철폐투쟁은 정말 신이 났어요. 군대에서 나오자 마자 온통 거리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힘든 날들이었지만 정말 신나는 데모행렬에 동참했지요. 그리고는 복학 후 87년 대선 공정선거 감시단 동구위원장을 맡아서 투쟁하였어요. 88년엔 전남대 예비역협의회 건설준비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자기 계산속에서만 놀고자 하는 군 제대자들이 당당한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했어요. 그 해 나는 88년 오월학살원흉 미제 및 전두환 노태우 처단을 위한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서 위원 중 맡형으로서 오월투쟁을 주동하였습니다. 예비군복을 입고 나가서 투쟁을 하고 마이크를 잡고 화염병을 던지는 일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예비역이 저럴 수 있나 하는 찬사와 함께 여학생들에게도 인기 캡이었답니다. 신나는 오월투쟁을 마감하니 6월 조국통일투쟁사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차피 오월특위로 수배 된 상태인데 못할 것이 없었지요. 하여 전대협에 전남대 오투위 명으로 통일결사대를 제안했답니다. 순수한 민간그룹의 통일논의 보장과 남북교류를 보장하라는 요지를 갖고 결사대를 전국적 차원에서 꾸렸어요. 물론 광주는 오월학살 진상규명의 문제를 더 제기 했지요. 80여명의 결사대 이름으로 통일부 장관 면담을 신청했고 싸움을 계획했어요. 아무런 반응없이 무시하는 정부 놈들을 모조리 태워버릴 양으로 세종로 소재 정부종합청사 불지르기 작전을 전개 하였습니다. 진격하여 화염병을 던지고 농성하던 중 다시 검거되고 몸도 많이 다치게 되어 경찰병원 신세를 지고 다시 징역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복무하던 중에 특별사면이 있었어요. 그 기회로 석방이 되어 7개월의 징역 생활을 마치고 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하였지요.
출소 하기 전 징역을 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치열한 시대의 한 역사를 보듬고 살아가는 젊은이의 삶과 의지를 가다듬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어요. 좀 더 차분하게 나를 정리해 보았지요. 그 때 나를 정리 해 볼 수 있는 도구로 선택한 게 바로 노래와 시였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나 많고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으로 되어 서로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힘을 줄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것 중의 으뜸은 바로 시요 노래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여 별 실력도 없는 놈이 젊음과 패기 하나로 달려들었던 거예요. 초등학교 음악 책을 청계천에서 사다가 영치시키라고 해서 음악 이론 공부를 했고 볼펜이 없던 시절인지라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필기 할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하고 글을 적어갔던 겁니다. 그 중의 으뜸인 무기는 바로 못이였어요. 간간이 운동 나가 주워 온 못은 긁어 파기가 참 좋거든요. 우윳곽을 까서 거기에 눌러쓰면 제격이지요. 그렇게 글을 쓰며 시 쓰는 연습을 했고 노래를 만드는 연습을 하였어요. 그리고 3시간정도의 수면(학습을 위해)과 틈만 나면 벌어지는 단식투쟁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했고 결국 출소하면서 가지고 나온 곡이 약 200여 곡이나 되었답니다. 그 중에서 20곡을 선별하여 발표한 노래가 바로 분노테이프이고 나를 유명(?)하게 한 장본인의 노래랍니다. 그 때 징역에서 악보조차 제대로 그리기 힘든 징역에서 잉태 된 노래 중에는 [파랑새] [지리산] [여성전사] [나의사랑] [분노]등이 있었어요. 그 당시의 만들었던 노래가 내가 만든 노래 중의 으뜸이라 할만하지요.
출소 후에는 창작된 노래를 가지고 앨범을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그리고 한 후배가 아버지 몰래 소를 끌고 와 팔아서 빌려 준 돈으로 앨범을 만들었어요. 몇날 며칠이 지나고 학교에 잠시 나가보던 어느 날, 5.18광장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학우들이 집회하면서 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그 때의 감정, 여러분은 아시겠어요. 상업적으로 인기에 영합하여 노래 한 곡 히트시키려고 만들고 부르는 자들은 죽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예요. 정말로 너무나 큰 감격이었어요. 그 때부터 나의 노래 인생 길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게 되었고, 이 후 3집 4집을 연거푸 내면서 [투쟁의 한길로] [바쳐야 한다]를 발표하게 되었어요.
이 즈음에 다시 나는 징역을 갈 고비를 맞게 됩니다. 3집의 [고난의 행군]이 문제가 되었지요. 전국적인 차원에서 나를 검거하려는 준동이 시작되었고 나는 앨범출시 하자마자 도바리(잠적)를 쳐 버렸는데도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곧 검거되고 말았어요. [고난의 행군]은 항일무장투쟁사를 그린 노래에요. 항일무장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을 드러냈고 북쪽의 항일투쟁까지 다루었기 때문에 이적 표현물이란 요지였어요. 결국 국가 보안법이라는 굴레로 징역 1년 6개월을 살았어요.
92년 출소 하자 마자 '출옥밤을 걷다가'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 후 [갈길은 간다]라는 앨범을 냈어요. 이 때 나온 노래는 물론 [갈 길은 간다] 였어요. 이 후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에게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을 가져다 주었고 나의 노래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였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럴 때 마다 나를 다잡을 수 있게 했던 가장 큰 동지는 바로 노래였어요. 정말로 힘들고 괴롭고 좌절하고 싶을 때는 노래를 불렀어요. 작업실에 문을 잠가놓고 10시간 가까이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불렀어요. 그 중에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갈길은 간다' 였답니다. 부르고 또 부르면서 나태해지지 않으려 했고 좀더 잘 만드는 노래보다는 투박하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며 실천하는 쪽을 택하는 창작과정을 지속시켜 왔어요. 90년대 중반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남은 것은 해골 밖에 없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 것이 운명이라면 쓰러지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네요.
2001년에는 평양을 다녀 왔어요. 사진들을 다 빼앗겨서 소개할 수 없지만 재판이 끝나면 받아와서 여러분께 소개 할래요(현재 재판 진행 중). 대부분 아시는 문제이니 더는 말하지 않겠어요. 7박8일 동안에 있었던 평양에서의 일은 나의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있으니 보아 주세요. 평양에서 돌아오자 마자 국정원으로 연행되었지만 결국 우리의 정당성이 인정되어 금보석으로 나왔어요. 분단이 후 잠입탈출이라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금보석은 아마 우리들이 처음일 거예요.
쓰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별 생각없이 쓰다보니 주절주절 잔소리가 길어 졌어요. 여러분이 나를 아는데 쬐끔은 도움이 되셨나 모르겠네요. 만 페이지를 다 써도 못다 할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할 순 없고 주제에 따라서 앞으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눌까해요. 그럼 이만해도 되겠지요.
언제 어디서나 건투를 빕니다.
2002년 여름
박종화 씀
가슴으로 읽고 갑니다...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인생을 보니... 제 삶이 부끄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