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우리는 되찾았다. 22일 우리들의 도시와 우리들의 꿈을 되찾았다. 시민군들이 도청을 장악하고 다들 승리의 굳은 약속을 나누며 새로운 투쟁을 약속하고 있었다. 태어나 가장 뜨겁게 타오른 도청 분수대의 시민궐기대회. 소년들은 떼를지어 빗자루로 도청앞 광장을 말끔히 쓸기도 했다. 그렇다. 해방광주! 쓰러진 벗들의 시신을 되찾아 태극기를 덮어주며 주먹을 불끈불끈 쥐어 올리던 해방광주! 26일까지 닷새간 우리는 모두 한핏줄 한겨레임을 똑똑히 확인했다.
5월 22일
12시 반경 목사 신부 학생 교사 등 민주인사 15명이 518사태 수습대책위원회 결성
5월 23일
아침 6시경 고교생을 중심으로 상가도 문을 열기 시작
오후 3시 대학생 주최 제1차 시민궐기대회가 십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도청앞 분수대에서 열림. 도청앞 상무관에 신원확인된 시체 30구 안치하고 분향소 설치. 도청앞을 민족의 광장이라 명명함
시내 각 병원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 호소. 수많은 헌혈 시민들이 모여들어 피가 남아 돌아감
5월 24일
오후 3시 제2차 민족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비가 내리는 가운데 5만 인파가 모임. 여성시민군 YWCA에서 대자보 작성. 궐기대회조, 홍보 및 가두방송조, 대자보조등 조직. 적극적 활동을 벌임
5월 25일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 개최.
희생자 가족 전국종교인전국민주학생들에게 드리는글 채택
시민군 대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 낭독
5월 26일
8시 30분 제4차 민주수호 궐기대회 개최. 전 언론인과 대한민국 국군에게 드리는 글 채택. 대회 도중 예비군(?)이 등장하여 예비군이여 궐기하자는 구호로 예비군 격려. 큰 호응 얻음.
12시경 시민기동타격대 조직. 5,6명 1개조로 과장(?) 1명, 타격대원 4, 5명, 군용찝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무기로 카빈 1정, 실탄 1크립씩 배정. 총 7개조 편성. 시내 순찰. 계엄군 진입 저지. 각 관공서 금융기관 등에 시민군 병력을 배치하여 치안을 유지함
오후 3시 제5차 민주수호 궐기대회 개최. 도청 사수를 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