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쳐야 한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나서라 전사여
그날을 위해
이 한 목숨 걸고 나서라
구차한 목숨으로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마셔
그렇게 마신 술에 내가 죽는다
붉은 맹세 붉은 피로 맺어진 동지여
죽어도 온다 그날은 온다 민족의 해방이여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지켜라 전사여
우리의 깃발
이 한 목숨 걸고 나서라
* * * *
열정 하나로 느즈막에 들어 선 노래창작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 할 때쯤 해서 '바쳐야 한다'는 만들어 졌다.내게 있어서 창작의 시작은 깊은 고민을 던져주지 못했다.만들어서 실패하더라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 그 뿐이고 좋은 노래가 만들어지면 더없이 좋겠다라는 정도로 출발하였다.누구 눈치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보고 싶어서는 더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만든 노래에 대한 생각도 내가 만들어 내가 부르고,옆에 있는 한 동지만이라도 불러주면 그 뿐이라는게 전부였다.물론 창작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자신감과 반드시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있었다.그런 확신의 이유가 뭐였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문예의 길에서 오랜동안 머물렀던 지나온 날이 그런 확신을 갖게 했나보다.
애써 의미를 축소하던 뜻과는 달리 첫 작품을 내 놓고 엄청난 홍역을 치뤄야만 했다.복에 겨운 홍역이었다.노래는 나의 상상을 초월한 대중의 격려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가까이서 지켜보던 동지들이 시골가서 소 팔아 오고,납부금을 대신 갖다주고,월급받아 건네주고 무작정 교정에 나가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닥치는데로 만원씩 강도질(?)해 만든 테이프가,그 따뜻한 동지들의 무한한 사랑에 다행스럽게도 보답을 하고 말았다.돌아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테이프 하나 만드는데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과 기술 그리고 돈이 들어 간다는 것도 제작을 해 가면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제작과정은 한 마디로 배우러 다니는 정도 였으니 제작 순간순간이 위태로웠다.하나를 채우면 하나가 모자라고,또 하나를 채우면 모자란 다른 하나를 채우러 뛰어다니고 말이다. 멋모르고 진행하다보니 비용도 일반값에 비해 거의 두배 이상을 들어야 하는 비싼 댓가를 지불했다.그렇다고 내게 조언을 해 준사람은 없었다.유일하게 스튜디오 사용을 조건없이 싼 가격으로 사용하게 한 '소리모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형님들만 생각난다.잘 만들어 보라는 말은 많아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했다.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었다면 소값하며,등록금 하며,강도질 하며 닥치는대로 가져다 쓴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겠는가! 생각을 하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노래는 퍼지고 창작집은 남다른 사랑을 받게 되었다.능력있는 작곡가여서도 아니고 경륜있는 활동가여서도 아닌 그런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사람들이 애정어린 관심을 갖고 유별나게 사랑을 해 주었던 것은 실천하는 오늘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대중의 허전한 가슴을 깊게 파고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다.
동지들의 사랑이 깊어 갈 때 나는 반대로 고민으로 빠져 들었다.자신의 진로와 책임있는 노래 작업의 뒷처리와 대중들에게 끼친 영향의 재고 등등이 머리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깊은 사색과 연구로 이론울 정립해야 했고,다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작품을 내 와야 하는 부담도 안게 되었다.그야말로 앞으로의 진로와 직결되는 지점이었다.계속해서 별다른 능력없는 상태로 노래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전에 결심을 굳힌대로 지금과 상관없이 나갈 것인가! 판단의 갈팡질팡은 생각과는 달리 쉽게 끝나고 말았다.
90년 오월은 광주항쟁 10주년이 되었던 해다.오월제가 예년에 비해 다양하게 치루어졌다.나도 참가하여 오월 노래발표를 결행했다.그것이 나로서는 동지들과 함께 해보는 첫 노래공연이었다.이제 더 이상 고민 해야 할 여지가 없었다.많은 노력을 해 가면서 대중과 호흡하는 공연을 치루어 내고 말았으니 어떤방식으로든 문예의 길을 책임성 있게 내 와야 했다.공연내용은 시와 노래가 어울어지는 오월 형상화였다.사회에 나와서 해 보는 노래공연이 처음인지라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엉성했던 것 같다.
어쨓든 공연에 필요한 20곡 정도를 짧은 시간동안 만들어야 했다.정신없이 날밤을 새고 정해진 시간에 임무를 완수했다.동지들과 작품평가를 하면서 뺄것은 빼고,고칠 것은 고쳐가며 연습으로 치달렸다.이 때는 이미 '바쳐야 한다'가 완성된 후였다 그렇지만 평가 하는 곳에 내놓지 않았다. '바쳐야 한다`는 덮여진 오선지 위에 조용히 잠들고 있었다.
수 십곡을 만들어 놓고도 한 두곡 정도 밖에 발표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 창작실력의 전부였던 바에 남들은 그것을 미련한 방법이라고 비아냥 거릴지도 모른다.사실 두루두루 실력을 겸비하지 못한 괴팍하면서도 미련스런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노래를 만든다.미련한 방법인지는 몰라도 제한없이 생활을 일기 쓰듯이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서 좋다.
관념적 창작 뭉치에 시도 때도 없이 매달려 스스로를 인내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것 보다는 서스름 없는 생활 감정을 마음껏 찾아 나서는 것이 즐겁고 좋다.어떤 주제를 의식적으로 정해 놓고 의무적으로 매달리는 창작은 만들어진 틀에 자신을 짜 맞추는 것과 흡사하다.하나에 집중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깊이있게 다가 온 소재거리나 종자로 부터 출발하고 그럴 때만이 작가의 진실한 창작열정은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알아주지도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 받는 일이 없어도 미련스런 방법은 많은 작품을 쓰게했고,덩달아 쌓여 갔지만 대개는 볼품 없는 감자에 불과했다.이것이야 말로 진짜 내 노래다고 하는 애착이 없는 바에야 볼품없는 감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특히 관심도가 깊은 사람들이 묻는 자신이 자신있게 내놀만한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더욱 그랬다.창작방법이나 동기 그리고 애착을 갖는 노래등에 관해 물었을 때마다 느끼곤 했던 것은 절제된 정서로 내 자신을 간결하게 표현해 낸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노래를 만든이 후 고작 몇곡정도 사람의 입에 오르 내리게 되었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고민이 '바쳐야 한다'의 출발점이요 준비운동이었다.
수영을 하러 물에 들어 갈 때 운동을 하지 않고 뛰어든다고 해서 쉽게 죽진 않는다.하지만 준비운동을 하고 들어간 사람보다 심장마비의 확률은 크다.창작의 심장마비를 피하기 위한 준비운동은 자신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 하면서도 이 시대 청년의 애국적 정서의 모범이기를 끝없이 갈구했다.
어느 이름없는 축하모임에서다.
한 친구가 축시를 멋들어지게 즉흥시로 대신 했었다.애석히도 고인이 되신 이광웅 선생님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를 빌어 낭송을 했었는데 야릇하게 나를 사로 잡았다.일상 때 같았으면 그저 그러려니하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겠지만 나를 표현하고 나를 말할 수 있는 노래에 집착을 하고 있었던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시가 낭송되는 중에 내가 써 내려가고 있었던 글(지금의 바쳐야 한다의 2절)과 비교 하면서 음미를 해 보았다.짧은 순간이었다.
보편적으로 작품을 쓸 때는 가사가 먼저 나오고 먼저 쓴 가사는 당연히 일절이 되는 것이 상례다.거기다 덧붙이면 이절이 된다.그렇듯 나도 일절을 먼저 써서 선율을 붙여가고 있던 중이었다.그런 때에 한 모임장에서 시낭송을 접하게 된 것이다.어려운 창작의 길목에서 허우적 거리고 2절과 끙끙거리던 때를 뒤엎어 버리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싯점이었다.
술과 사랑 동지는 삶과 투쟁 삶의 삼위 일체를 표현해 내는 일상의 소잿거리다.그것을 다 가사안에 집어 넣고 나니 더 이상 쓸말이 없었다.특색있는 소재나 대상을 찾지 못하고 일절의 내용을 이절에서 반복 한다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고역을 뚫고 시 하나가 다가온다.비록 내가 쓴 노랫말과 낭송된 그 시가 약간 다른 각도지만 술과 사랑이 있다는데 아주 흡족한 것이었다.그것이 생활적인 소재라는 생각에서였다.내 노래에 목숨이나 피같은 단어가 두서없이 많다는 사람들의 지적에 가급적 충실하려 했던 당시의 노력들이 일 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시 낭송이 가져다 준 특유의 감동은 일이절의 가사반복으로 인한 실패도 감내하겠다는 결의까지 던져 주었던 것이다.오랜 준비 운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리고 완성된다.
지금도 이 노래의 구체성은 이절에 있다고 생각한다.역동적이며 생동감이 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그럼에도 일절과 이절의 배치를 거꾸로 하고 만 것은 숨기려 하는 관성탓이 크다.별로 좋지 않는 창작 태도이다.
술과 사랑을 말하면서 확실하고 분명한 제 목소리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나약함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하여 내 목소리는 이절에 감추고 다른 사람의 시를 통한 발설로 앞으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작품에 대한 부담을 덜어보고자 하는 간교함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또 한편으론 생활습성에서 몸에 배긴 나의 관성 탓이다.웬지 숨기고 픈 그런 관성이다.어디를 가서라도 밝은 곳 보다는 어두운 곳을,넓은 곳보다는 좁은 곳을 찾는 희안한 습성이다.생활습관이나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이렇듯 작품에 까지도 깊이있게 관여한다.사업 작풍에도 스믈스믈 기어든다 조심해야 겠다.
오월제 공연에서 발표하지 않은 채 덮여진 오선지에 잠을 자고 있어야 할 '바쳐야 한다'는 무슨이유를 가지고 있었을까 살펴 보기로 하자.
어떤노래이든지 처음부터 완벽한 곡으로 출연하진 않는다.작가의 오랜 손질을 거치면서 나오게 된다.듣는 사람들도 처음 들었을 때 한 번으로 좋은 노래를 분간하기란 어려운 문재다.그 시대가 던져주는 정서도 고려되어야 하고 흐름에 맞는 선율도 고려되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쉽게 판단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물론 처음 들어서 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노래들도 있다.반면에 자꾸 불러봐야 제 맛이 나는 노래도 있다.자꾸 가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하는 부류의 노래가 그것이다.처음에는 좋게 들렸다가 몇 번 더 들으면 금새 식상해지고 마는 노래도 있다.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내려앉는 노래들 중에서 대부분은 그저 노래가 좋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하여,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가슴에 젖어들면서 좋은 노래의 대열로 뛰어든다.때문에 처음 듣는 순간에 일시적으로 부담스럽다고 해서 노래를 뜯어 고친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작품의 손질은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것과 흡사한 보이지 않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수술이 잘되면 건강 하겠지만 잘못되면 죽듯이 두려움은 노래손질에도 있기 마련이다.그래서 주저하기 일쑤지만 동지들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버티는 그런 생각이 기우에 지나지 않게 된다.노래를 만들어 동지들 앞에 내 놓게 되면 칼질은 바로 시작된다.어쩔 땐 고치기위해 노래 감상을 한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고민없이 즉흥적으로 느끼는대로 노래를 고치려 들기도 한다.조금만 부담스러워도 듬성듬성 가위질 하기를 요청한다.수술은 듬성듬성 되는 것이 아니다.노래를 고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한 곳을 고치려면 그와 연결된 모든 고리 즉 선율에 부담을 주지않게 고쳐 주어야 한다.선율에도 그 만의 구조와 질서를 갖기 때문이다.그래도 난 노래 수정작업을 동지들과 함께하는 것에 적극적인 편이었다.서스름없이 고치는 편이 많다.이해 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고치자고 해도 대다수의 의견이라면 주저없이 고쳐간다.노래의 전체구성이 달라져도 상관없다.그렇게 해서 노래가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함께하는 것에 기쁨을 두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그 때를 생각해 보면 가끔씩 창작에 관한 개성의 차이로 부딛힌 것 같은데 결단코 내가 만들었다는 개인주의적 집착을 손에 쥐고 부딛힌 적은 없다.
오월제에 나서는 날에 노래는 동지들 앞에 얼굴을 내 밀고 형편없는 생채기를 들어 내 놓은곳이 다듬질 되어 갔다.계속 다른 일만 하다가 노래가 쓰여질 목적과 위상이 정해지면 빠르고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많은 노래를 내 놓는 습성때문에,이것저것 돌볼 겨를도 없이 내놓았고 뒷처리는 동지들이 고생으로 마감이 되었다.이런과정이 진행되고 있을 때 '바쳐야 한다'는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내놓으면 고쳐 버릴 것만 같은 조바심이 노래를 내놓지 못하게 했다.일정정도 노래에 대한 사상의지적 신념이 있었던 탓에 고치기를 반대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노래 전개의 어색함을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바쳐야 한다'는 애초 만들어진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대중을 만나게 되었다.그 당시 오월제 공연에도 오르지 않았으니 품평의 대상에도 끼어들지 않았고 별 탈없이 오월 고개를 넘는다 공연장에도 신곡으로 내놓지 못 할만큼 마음속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해 있었다.
노래를 늦게서야 내놓고 말하지 못한 그 때의 오월고개가 나만의 고충이었음을 함께했던 동지들에게 고백한다.
설사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애국적 전형을 찾는 노래가 못되었다 할지라도 '바쳐야 한다'는 나 혼자만일 지언정 전형으로 삼는다.어딜가나 누가 노래를 시키면 이 노래를 부른다.내가 만든 노래중에서 그나마 가사를 외워서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몇 곡 안되는 노래중의 으뜸이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나서라 전사여
그날을 위해
이 한 목숨 걸고 나서라
구차한 목숨으로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마셔
그렇게 마신 술에 내가 죽는다
붉은 맹세 붉은 피로 맺어진 동지여
죽어도 온다 그날은 온다 민족의 해방이여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지켜라 전사여
우리의 깃발
이 한 목숨 걸고 나서라
* * * *
열정 하나로 느즈막에 들어 선 노래창작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 할 때쯤 해서 '바쳐야 한다'는 만들어 졌다.내게 있어서 창작의 시작은 깊은 고민을 던져주지 못했다.만들어서 실패하더라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 그 뿐이고 좋은 노래가 만들어지면 더없이 좋겠다라는 정도로 출발하였다.누구 눈치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보고 싶어서는 더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만든 노래에 대한 생각도 내가 만들어 내가 부르고,옆에 있는 한 동지만이라도 불러주면 그 뿐이라는게 전부였다.물론 창작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자신감과 반드시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있었다.그런 확신의 이유가 뭐였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문예의 길에서 오랜동안 머물렀던 지나온 날이 그런 확신을 갖게 했나보다.
애써 의미를 축소하던 뜻과는 달리 첫 작품을 내 놓고 엄청난 홍역을 치뤄야만 했다.복에 겨운 홍역이었다.노래는 나의 상상을 초월한 대중의 격려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가까이서 지켜보던 동지들이 시골가서 소 팔아 오고,납부금을 대신 갖다주고,월급받아 건네주고 무작정 교정에 나가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닥치는데로 만원씩 강도질(?)해 만든 테이프가,그 따뜻한 동지들의 무한한 사랑에 다행스럽게도 보답을 하고 말았다.돌아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테이프 하나 만드는데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과 기술 그리고 돈이 들어 간다는 것도 제작을 해 가면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제작과정은 한 마디로 배우러 다니는 정도 였으니 제작 순간순간이 위태로웠다.하나를 채우면 하나가 모자라고,또 하나를 채우면 모자란 다른 하나를 채우러 뛰어다니고 말이다. 멋모르고 진행하다보니 비용도 일반값에 비해 거의 두배 이상을 들어야 하는 비싼 댓가를 지불했다.그렇다고 내게 조언을 해 준사람은 없었다.유일하게 스튜디오 사용을 조건없이 싼 가격으로 사용하게 한 '소리모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형님들만 생각난다.잘 만들어 보라는 말은 많아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했다.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었다면 소값하며,등록금 하며,강도질 하며 닥치는대로 가져다 쓴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겠는가! 생각을 하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노래는 퍼지고 창작집은 남다른 사랑을 받게 되었다.능력있는 작곡가여서도 아니고 경륜있는 활동가여서도 아닌 그런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사람들이 애정어린 관심을 갖고 유별나게 사랑을 해 주었던 것은 실천하는 오늘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대중의 허전한 가슴을 깊게 파고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다.
동지들의 사랑이 깊어 갈 때 나는 반대로 고민으로 빠져 들었다.자신의 진로와 책임있는 노래 작업의 뒷처리와 대중들에게 끼친 영향의 재고 등등이 머리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깊은 사색과 연구로 이론울 정립해야 했고,다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작품을 내 와야 하는 부담도 안게 되었다.그야말로 앞으로의 진로와 직결되는 지점이었다.계속해서 별다른 능력없는 상태로 노래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전에 결심을 굳힌대로 지금과 상관없이 나갈 것인가! 판단의 갈팡질팡은 생각과는 달리 쉽게 끝나고 말았다.
90년 오월은 광주항쟁 10주년이 되었던 해다.오월제가 예년에 비해 다양하게 치루어졌다.나도 참가하여 오월 노래발표를 결행했다.그것이 나로서는 동지들과 함께 해보는 첫 노래공연이었다.이제 더 이상 고민 해야 할 여지가 없었다.많은 노력을 해 가면서 대중과 호흡하는 공연을 치루어 내고 말았으니 어떤방식으로든 문예의 길을 책임성 있게 내 와야 했다.공연내용은 시와 노래가 어울어지는 오월 형상화였다.사회에 나와서 해 보는 노래공연이 처음인지라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엉성했던 것 같다.
어쨓든 공연에 필요한 20곡 정도를 짧은 시간동안 만들어야 했다.정신없이 날밤을 새고 정해진 시간에 임무를 완수했다.동지들과 작품평가를 하면서 뺄것은 빼고,고칠 것은 고쳐가며 연습으로 치달렸다.이 때는 이미 '바쳐야 한다'가 완성된 후였다 그렇지만 평가 하는 곳에 내놓지 않았다. '바쳐야 한다`는 덮여진 오선지 위에 조용히 잠들고 있었다.
수 십곡을 만들어 놓고도 한 두곡 정도 밖에 발표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 창작실력의 전부였던 바에 남들은 그것을 미련한 방법이라고 비아냥 거릴지도 모른다.사실 두루두루 실력을 겸비하지 못한 괴팍하면서도 미련스런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노래를 만든다.미련한 방법인지는 몰라도 제한없이 생활을 일기 쓰듯이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서 좋다.
관념적 창작 뭉치에 시도 때도 없이 매달려 스스로를 인내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것 보다는 서스름 없는 생활 감정을 마음껏 찾아 나서는 것이 즐겁고 좋다.어떤 주제를 의식적으로 정해 놓고 의무적으로 매달리는 창작은 만들어진 틀에 자신을 짜 맞추는 것과 흡사하다.하나에 집중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깊이있게 다가 온 소재거리나 종자로 부터 출발하고 그럴 때만이 작가의 진실한 창작열정은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알아주지도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 받는 일이 없어도 미련스런 방법은 많은 작품을 쓰게했고,덩달아 쌓여 갔지만 대개는 볼품 없는 감자에 불과했다.이것이야 말로 진짜 내 노래다고 하는 애착이 없는 바에야 볼품없는 감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특히 관심도가 깊은 사람들이 묻는 자신이 자신있게 내놀만한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더욱 그랬다.창작방법이나 동기 그리고 애착을 갖는 노래등에 관해 물었을 때마다 느끼곤 했던 것은 절제된 정서로 내 자신을 간결하게 표현해 낸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노래를 만든이 후 고작 몇곡정도 사람의 입에 오르 내리게 되었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고민이 '바쳐야 한다'의 출발점이요 준비운동이었다.
수영을 하러 물에 들어 갈 때 운동을 하지 않고 뛰어든다고 해서 쉽게 죽진 않는다.하지만 준비운동을 하고 들어간 사람보다 심장마비의 확률은 크다.창작의 심장마비를 피하기 위한 준비운동은 자신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 하면서도 이 시대 청년의 애국적 정서의 모범이기를 끝없이 갈구했다.
어느 이름없는 축하모임에서다.
한 친구가 축시를 멋들어지게 즉흥시로 대신 했었다.애석히도 고인이 되신 이광웅 선생님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를 빌어 낭송을 했었는데 야릇하게 나를 사로 잡았다.일상 때 같았으면 그저 그러려니하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겠지만 나를 표현하고 나를 말할 수 있는 노래에 집착을 하고 있었던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시가 낭송되는 중에 내가 써 내려가고 있었던 글(지금의 바쳐야 한다의 2절)과 비교 하면서 음미를 해 보았다.짧은 순간이었다.
보편적으로 작품을 쓸 때는 가사가 먼저 나오고 먼저 쓴 가사는 당연히 일절이 되는 것이 상례다.거기다 덧붙이면 이절이 된다.그렇듯 나도 일절을 먼저 써서 선율을 붙여가고 있던 중이었다.그런 때에 한 모임장에서 시낭송을 접하게 된 것이다.어려운 창작의 길목에서 허우적 거리고 2절과 끙끙거리던 때를 뒤엎어 버리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싯점이었다.
술과 사랑 동지는 삶과 투쟁 삶의 삼위 일체를 표현해 내는 일상의 소잿거리다.그것을 다 가사안에 집어 넣고 나니 더 이상 쓸말이 없었다.특색있는 소재나 대상을 찾지 못하고 일절의 내용을 이절에서 반복 한다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고역을 뚫고 시 하나가 다가온다.비록 내가 쓴 노랫말과 낭송된 그 시가 약간 다른 각도지만 술과 사랑이 있다는데 아주 흡족한 것이었다.그것이 생활적인 소재라는 생각에서였다.내 노래에 목숨이나 피같은 단어가 두서없이 많다는 사람들의 지적에 가급적 충실하려 했던 당시의 노력들이 일 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시 낭송이 가져다 준 특유의 감동은 일이절의 가사반복으로 인한 실패도 감내하겠다는 결의까지 던져 주었던 것이다.오랜 준비 운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리고 완성된다.
지금도 이 노래의 구체성은 이절에 있다고 생각한다.역동적이며 생동감이 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그럼에도 일절과 이절의 배치를 거꾸로 하고 만 것은 숨기려 하는 관성탓이 크다.별로 좋지 않는 창작 태도이다.
술과 사랑을 말하면서 확실하고 분명한 제 목소리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나약함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하여 내 목소리는 이절에 감추고 다른 사람의 시를 통한 발설로 앞으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작품에 대한 부담을 덜어보고자 하는 간교함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또 한편으론 생활습성에서 몸에 배긴 나의 관성 탓이다.웬지 숨기고 픈 그런 관성이다.어디를 가서라도 밝은 곳 보다는 어두운 곳을,넓은 곳보다는 좁은 곳을 찾는 희안한 습성이다.생활습관이나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이렇듯 작품에 까지도 깊이있게 관여한다.사업 작풍에도 스믈스믈 기어든다 조심해야 겠다.
오월제 공연에서 발표하지 않은 채 덮여진 오선지에 잠을 자고 있어야 할 '바쳐야 한다'는 무슨이유를 가지고 있었을까 살펴 보기로 하자.
어떤노래이든지 처음부터 완벽한 곡으로 출연하진 않는다.작가의 오랜 손질을 거치면서 나오게 된다.듣는 사람들도 처음 들었을 때 한 번으로 좋은 노래를 분간하기란 어려운 문재다.그 시대가 던져주는 정서도 고려되어야 하고 흐름에 맞는 선율도 고려되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쉽게 판단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물론 처음 들어서 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노래들도 있다.반면에 자꾸 불러봐야 제 맛이 나는 노래도 있다.자꾸 가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하는 부류의 노래가 그것이다.처음에는 좋게 들렸다가 몇 번 더 들으면 금새 식상해지고 마는 노래도 있다.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내려앉는 노래들 중에서 대부분은 그저 노래가 좋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하여,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가슴에 젖어들면서 좋은 노래의 대열로 뛰어든다.때문에 처음 듣는 순간에 일시적으로 부담스럽다고 해서 노래를 뜯어 고친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작품의 손질은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것과 흡사한 보이지 않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수술이 잘되면 건강 하겠지만 잘못되면 죽듯이 두려움은 노래손질에도 있기 마련이다.그래서 주저하기 일쑤지만 동지들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버티는 그런 생각이 기우에 지나지 않게 된다.노래를 만들어 동지들 앞에 내 놓게 되면 칼질은 바로 시작된다.어쩔 땐 고치기위해 노래 감상을 한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고민없이 즉흥적으로 느끼는대로 노래를 고치려 들기도 한다.조금만 부담스러워도 듬성듬성 가위질 하기를 요청한다.수술은 듬성듬성 되는 것이 아니다.노래를 고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한 곳을 고치려면 그와 연결된 모든 고리 즉 선율에 부담을 주지않게 고쳐 주어야 한다.선율에도 그 만의 구조와 질서를 갖기 때문이다.그래도 난 노래 수정작업을 동지들과 함께하는 것에 적극적인 편이었다.서스름없이 고치는 편이 많다.이해 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고치자고 해도 대다수의 의견이라면 주저없이 고쳐간다.노래의 전체구성이 달라져도 상관없다.그렇게 해서 노래가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함께하는 것에 기쁨을 두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그 때를 생각해 보면 가끔씩 창작에 관한 개성의 차이로 부딛힌 것 같은데 결단코 내가 만들었다는 개인주의적 집착을 손에 쥐고 부딛힌 적은 없다.
오월제에 나서는 날에 노래는 동지들 앞에 얼굴을 내 밀고 형편없는 생채기를 들어 내 놓은곳이 다듬질 되어 갔다.계속 다른 일만 하다가 노래가 쓰여질 목적과 위상이 정해지면 빠르고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많은 노래를 내 놓는 습성때문에,이것저것 돌볼 겨를도 없이 내놓았고 뒷처리는 동지들이 고생으로 마감이 되었다.이런과정이 진행되고 있을 때 '바쳐야 한다'는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내놓으면 고쳐 버릴 것만 같은 조바심이 노래를 내놓지 못하게 했다.일정정도 노래에 대한 사상의지적 신념이 있었던 탓에 고치기를 반대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노래 전개의 어색함을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바쳐야 한다'는 애초 만들어진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대중을 만나게 되었다.그 당시 오월제 공연에도 오르지 않았으니 품평의 대상에도 끼어들지 않았고 별 탈없이 오월 고개를 넘는다 공연장에도 신곡으로 내놓지 못 할만큼 마음속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해 있었다.
노래를 늦게서야 내놓고 말하지 못한 그 때의 오월고개가 나만의 고충이었음을 함께했던 동지들에게 고백한다.
설사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애국적 전형을 찾는 노래가 못되었다 할지라도 '바쳐야 한다'는 나 혼자만일 지언정 전형으로 삼는다.어딜가나 누가 노래를 시키면 이 노래를 부른다.내가 만든 노래중에서 그나마 가사를 외워서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몇 곡 안되는 노래중의 으뜸이다.
아직 살아있나?
나 경상도 임영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