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산 편지
사랑하는 이여
봄은 언제나 변함없이 때가되면 오듯이
우리는 다시 봄처럼 당신을 만나러 여기에 왔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끙끙 앓는 신열로 아파해야만 하는
항쟁의 도시 광주의 오월길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그리운 이여
감시와 멸시와 억압을 깨고 세워진
당신의 비석글씨가 채 마르기도 전에
먹칠을 당하고
유골마저 파헤쳐 지고
영혼마저 난도질 당하고 만
오욕과 살육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로
지리산에서 회문산으로 다시 보광사에서
여기 백아산까지 왔습니다
보고픈 이여
겹겹이 쌓인 한들이 온 산을 이룬 채로
들어누운 당신의 영혼을 만나는 이 순간이
한 없이 부끄러운 오늘이지만
결코 서러워하지는 않습니다
강따라 물따라 온 길이 아니라
귀중하고 귀중한 사상의 보따리 하나씩
등에 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한순간도 버리지 않고 한생을 다 바친
당신의 삶을 온전하게 싸들고 왔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변하듯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의 생각들을 바꾸며
개인의 안락만을 위한 상식의 반동이
온통 세상을 덮고 있는 오늘에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조국통일의 신심 하나씩을
가슴에 담고 왔기 때문입니다
조국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사랑하는 이여
민족이라는 사랑을 품었던 그리운 이여
통일이라는 청춘을 살았던 보고픈 이여
당신의 이름과 사랑 당신의 청춘이
지금 서울과 평양을 오가고 있음을 아시나요
당신의 조국과 민족 그리고 통일이
민족중시와 평화수호 단합실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길을 헤치며 달리고 있음을 아시나요
반 백년을 훨씬 넘긴 채로
수 많은 청춘들의 피눈물을 다 뿌리고 난 다음에야
애끓는 통일열사들의 목숨이 던져지고 난 다음에야
가까스로 밟아가는 속력이라해도
당신의 이름과 사랑과 청춘의 기름으로
민족사랑을 태운 통일열차가 움직이고 있음을 아시나요
질기고 질긴 불멸의 투혼으로
아직도 못다한 영혼으로
통일간두의 맨 앞장에 서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정녕 아시나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운 이여
보고픈 이여
아직까지 구천길을 접어들지 못했더라도
다급해 마시라
헤매이는 영혼이 살벌하게 춥더라도 좌절하지 마시라
눈물나게 기쁠 날 있으리니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편안히 잠들 날 있으리니
정말 세상 잘 살았다고 함성으로 울부짖을 날 있으리니
삼천리 조국강토에 당신의 향기가 퍼져
온 겨레와 함께 호흡하며 서로의 살을 맞댈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