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 편

by 종화 posted Oct 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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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시린 가을이다

며칠 전에 동네 아제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성히 자란 풀을 베어달라는 곳이 있는데 자기는 바빠서 못하겠고
용돈이라도 벌 양이면 나더러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전화다
마침 용돈도 궁하고 시간도 좀 남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예초기를 들고 가르쳐 준 일터로 갔더니
풀이며 나무며 무성한 것이 몇 년은 베어내지 않은 듯하다
정신없이 일을 했다
하루일이 다 끝나도록 주인이란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일을 나가 쌔빠지게 일을 했다
여전히 일 시킨 사람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참 웃긴 일이다
인부 일 시켜놓고 새참은커녕 점심도 챙겨주지 않는다
3일 째 되는 날 또 뒈져라 일을 했다
오후 3시쯤 돼서
빨간 넥타이에 양복남생이 차려입고 한 아저씨가 찾아왔다
얼굴엔 정신적 빈곤 끼가 좔좔 흐른다
이 땅 주인이란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집터를 닦을려고 풀을 벤다는 설명을 늘여놓고
뒷짐에 잡고 있던 음료수 한 병을 내 놓고 맛있게 마시라 하고 서둘러 가버린다
뚜껑은 녹이 탱탱 슬었다
700원짜리 오란씨 한 병이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갈 때 엄마가 삶은 계란과 함께 항상 챙겨주던
그 오란씨 음료수다
환타도 잘 안 먹는 요즘에 100원이라도 더 싼 것을 고른답시고
오란씨를 골랐나보다
시골이라 아직도 구멍가게에 가면 있나보다
나를 뭘로 보는 것일까
사람으로 보기는 보는 것일까
아니면 이조시대 머슴쯤으로 보는 것일까
그렇다 한들 밥을 주든지 밥값을 쳐주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이
밥과 새참을 주는 것과 똑같은 임금조건에
밥도 안주고 새참도 안주고 있다가
3일 만에 와서 녹슬은 기찻길이 아니라 녹슬은 오란씨 한 병이다
이것이나마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갑자기 울화통이 터져버린다
일주일 일감인데 더 이상 일 못하겠다
고 놈이 가져다 논 오란씨는 잘 보이라고
사람 눈높이만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 두고
너나 많이 쳐 드시라고
까치밥 홍시처럼 헤롱헤롱 걸쳐두고 집으로 와 버렸다
시골인심마저 이래서야...

참 아린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