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을 지나니

by 종화 posted Nov 2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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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전
80년 오월민중항쟁의 피어린 역사의 뒤끝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포효를 울릴 때까지
암울한 사회적 현실을 등에 지고 살아야만 되었던 21년 전
학교 다니면서 뭔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나는 전국을 많이 돌아 다녔던 편이다
그렇게 각 대학을 돌아 다니면서
현실에 대한 대화들을 많이 나누곤 했었다
그때 만났던 동지들 중에는 지금도 만나고 있는 동지들이 있다
참 깊고 질긴 인연이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대문과 관련해서 생각 나는 21년전의 이야기다
고려대학교를 들어가서 사회과학 동아리 동지들을 만났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오랜 동지와 같이 맞아주고
우리는 금새 친해져 버렸다 그들과 술을 마시고
사회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항쟁의 처절했던 순간들을 입으로 전해주고
그렇게 술잔은 늘어가고 결국 이차 삼차를 외치다  
오게 된 곳이 남대문 앞이다
어떻게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가면 술 사줄 사람이 있다 해서 간 것 같다
공짜 술이라면 모든 걸 팽게치고 따라 붙었던 그 시절에
우리 세 사람은 의기도 양양히 남대문 앞에를 갔다
광주 촌놈이 서울 와서 남대문을 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동지들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저기 올라가서 술마시자
모두들 술기운이 머리에 오를대로 오른 상태에서 좋다고 했다
막걸리를 주섬주섬 사들고 라이타를 켜가며 엉금엉금 올라갔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앞에서 당겨주고 뒤에서 밀며
끙끙 올라가서 정자마냥 틀어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도 않고 대충 라이타에 의지하며 술을 마셔댔다
누구하나 뭐라하는 사람도 없고 그 순간엔 참 좋았다
얼마나 먹었는지 하나 둘씩 뒤로 누워 자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다

아뿔사
아침에 눈을 떠서 보니 완전히 대낮이었다
새벽 늦게야 잠을 잔 탓에 세상 모르고 술에 취해
셋이서 늦게까지 자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내려올수가 있었겠는가
창피해서라도 내려 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온몸이 완전히 시커먼 먼지로
범벅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털어도 털리지도 않는다
얼마나 때가 오래묵은 것인지 털어지지도 않고
얼굴은 숯검정이 되어 있고
서로의 꼬락서니를 쳐다보다가 우리가 누워잤던 바닥을 보니
폭설이 오면 쌓이는 눈처럼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결굴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 곳에 숨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깊은 밤을 틈타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 시커먼 몰골로 남대문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다짐했다
앞으로 술을 조심하자고
그리고 나서 찾아간 곳이 고대 앞 막걸리집이었다
술조심하자는 맹세를 앞세우고 외상으로 다시 술을 마시고
한 참 취기가 올라 올 즈음에 한 친구가 하는 말

오늘 또 갈까
....

남대문 앞에만 지나면 나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무모한 짓의 주인공이 되어 떠올린다
술취한 놈들의 주접을 일삼는 또라이가 되어 떠올린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장면을 떠 올리면서
벌써 나 이렇게 늙었는가
무모하더라도 주접이더라도
그 때가 좋았는데 !! 
화곡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