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누이

by 종화 posted Jun 1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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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백의천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소녀시절의 꿈을 키우고 키워
간호사가 된 우리의 누이 지연이가 제일 먼저 깨닫게 된 것은 노동자였습니다
간호사로서 꿈꿔왔던 세상과 너무나 다른 현실 앞에서 누이는  
노동자의 갈 길이 어디인가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치료하고 간호하면서
우리의 누이는  민중의 아픔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일을
가장 첫 번째 일로 생각하였기에 결국
참된 노동자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노조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고민하였고
민중의 삶이 바로 나의 삶이다 라는 가치관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소중하게만 생각하면서 일구워 왔던 기득권들을 포기한 채
전체를 걸고 민중을 위한 문화생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는 참으로 아픈 시절이었습니다
민중운동 한답시고 구로에 들어와 쌍판때기 내밀어 놓던 이들이
사실은 별로 잘나지도 못했던 그들이 슬슬 빠져나가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지금에 와서 제도 정치권에 발이라도 들여놓고 있는 이들이,
과거에 목숨걸고 싸웠노라고 말하고 있는 이들이,
후배들에게 운동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 준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돌아섰던 시기입니다
오늘날 금뱃지를 달고 국회앞을 얼쩡거리거나
그들 주위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해가고 있는 이들이
이 척박한 땅
민중의 땅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시련의 땅
노동자의 마지막 삶의 꿈틀거림이 일렁이는 땅 구로를
자신의 화려한 발판인양 밟으며 지나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 말입니다
힘겨운 투쟁으로 얼룩진 동지들도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결국 소시민의 열악한 생존권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해방운동을 접어가기 시작한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우리의 누이 지연이는 그렇게 혹독한 돌림병처럼 돌던
그 놈의 운동권 돌아서기가 시작되던 시기에
당당히 구로지역 문화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많던 선배동지들이 사라져가기 시작하더니
우리의 누이는 어느덧 구로의 문화생산을 담당해야할 지도의 위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선배동지들과 좀더 학습하고 좀더 많은 대중사업을 함으로서 배워야 할텐데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속해있던 조직이 국가보안법 위반조직이 되어 피검되고 조사를 받고
동지들이 징역까지 살게 될 때는 극도의 긴장감과 조직보위에 안간힘을 쓰면서
폭압에 딸려가는 선배동지들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누이는 그렇게 선배들을 떠나보내고 조직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야만 했습니다
어렵고 어려운 조직의 운영방식을 제대로 알리 없었던 누이였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도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대견하였습니다
지연이를 비롯한 은경이 남숙이 용현이 등등
조직을 지키고 있는 모두가 안쓰러워
저는 하루가 멀다하고 광주에서 구로를 왔다갔다 했습니다
얼굴 한 번 보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되는 우리들의 사이가
이렇듯 어려운 조건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조직운영의 열악한 조건을 딛고서도
웃음 한 번 놓지않던 누이
어떤 어려운 사업이더라도
형의 노랫말처럼 목숨걸면 안되는 일이 어딨겠어 라며
도리어 나를 위로 하던 민중의 딸 구로의 딸 우리의 누이
세월이 흘러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자신이 키워 온 조직이 문을 닫은 후에도
민중운동 안에서 자신을 가두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부림치던 누이  
그런 누이의 열정은 그대로 고스란히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는 날 까지 자신의 일을 민중을 위한 일에 가두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아무리 하찮게 보는 일이라도 주저없이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이제 그 누이의 몸은 우리 곁에 없습니다
그토록 청초롬했던 백의의 천사 누이의 몸은
우리 곁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름 빛내며 능력있게 사는 일은 정말로 쉬운 일입니다
이름도 없이 작고 작은 일에 온 사랑을 쏟으며
한길을 가는 삶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 어려운 길을 살다간 우리의 누이는 이제
몸이 아닌 영혼으로 우리 곁에 다시 살아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하고 싶습니다
혜진이의 엄마보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
참되고 참된 삶을 위해
구로에 들어와서
구로를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자신의 육신을 묻고 만 우리의 누이는 분명
구로의 딸이라고 말입니다
자랑스런 조국의 딸이라고 말입니다

고난의 시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폭압의 시기 또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뼛속까지 스미는 사랑으로
구로사랑을 조국사랑으로 승화시켜 가는 우리가 될 때
우리의 누이 지연이는 부활할 것입니다

누이야 나 이제 어떡하냐
나 서울오면 너 보고 싶어 어떡하냐
단이와 결이한테 혜진엄마가 죽었단다 라고 말했더니
아빠 그럼 우리 어디로 놀러가 라고 말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라
그래도 슬퍼하지 않으련다
오직 너의 소박하고도 순수한 마음만을 간직하며
참 된 하루를 살아가는 가늠자로
너를 거울로 삼고 살아가련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희망으로 피어날 우리의 누이여
잘 가시라
제발 잘 가시라
어떤 원한도 우리가 잊지 않으리라

                        2004년 6월 9일 강지연동지를 떠나 보내는 구로에서